시상속에서 새로 핀 우리말 찾기 - 김재홍교수 '時語사전' 펴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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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물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 섰을 뿐이다'.서정주 시인의'꽃밭의 독백'한 부분.여기서'물낯바닥'이란 말을 아는 사람도,쓰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국어사전에도 나와있지 않다.시인이 그 시에 가장 잘 어울리게 만든 말이므로.이 시에서'물낯바닥'을'수면(水面)'으로 바꾸면 깊이와 맛이 떨어진다.우리말은 한자와 같이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사물의 있는 그대로 우리 마음을 울리며 들어온다.

시인들은 모든 삶의 뜻인 말을 가꾸고 지키고 담는다.또 새로운 말을 끊임없이 만들어 우리네 삶을 깊고 아름답게 나아가게 한다.이러한 우리말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모은 사전이 나왔다.

문학평론가 김재홍(50.경희대 교수)씨가 최남선에서 90년대 시인들까지의 시집 1만5천여권을 읽으며 거기에 나온 모든 시어(詩語)들을 사전적 개념(槪念)은 물론 그 너머의 의미까지 풀이한'한국 현대시 시어사전'(고려대출판부)을 펴냈다.이 사전에는 시에 나오는 우리 일상어는 물론 시인들이 새로 만든 말,옛날말.방언.속어등 1만2천여 단어를 시를 통해 밝혀놓고 있다.

'어린 딸 나비잠 위로 뜬 보름달/오 놀라워라 그 속에 핀/간 봄 오동꽃의 연보라'.중견시인 박태일씨는 어린 딸의 잠자는 모습을'나비잠'이라고 했다.잠자는 딸의 귀여운 모습,갓 나온 한세상 예쁘게 하늘하늘 부디 잘 살았으면 하는 부모의 소망까지 담긴 말이다.

시인들은 이렇게 잠에 대해서도 가지가지 의미있는 말들을 만든다.여자와의 첫날밤 잠은'꽃잠',군인들이 행군도중 잠깐 눈붙이는 잠은'쪽잠',세상 떠내려가도 모르게 깊이 든 잠은'말뚝잠'등으로 시인들은 끊임없이 우리말을 만들며 삶의 뜻을 넓혀나간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노래로도 나와 많은 사람들이 애독.애창하는 정지용의'향수'첫부분.여기서'해설피'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서글프게''슬프게'쪽으로 풀이하는 사람도 많다.그러나 이 사전은'해설피'를'해질 머리',즉 해가 기울 무렵으로 밝히고 있다.해거름 무렵의 노을이기에'울음'이'금빛'이란 색채를 띠며 그 이미지는 또 소의 누런'황소'와 합치되게 된다.

'님두시고 가는길의 애끈한 마음이여/한숨쉬면 꺼질듯한 조매로운 꿈길이여/이밤은 캄캄한 어느뉘 시골인가/이슬가치 고힌눈물을 손끗으로 깨치나니'. 김영랑의'님두시고'전문이다.이 시를 읽으면 말 소리 자체가 청아한 음악으로 들린다.'애끈한''조매로운'등 섬세한 형용사를 사용해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리고 있다.일제하 우리 민족어를 아름답게 갈고 닦는 그 자체는 바로 민족혼을 지키는 것이었다.이런 우리말 가꾸고 지키기는 해방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모란꽃 이우는 하얀 해으름/강을 건너는 청모시 옷고름//仙桃山/水晶 그늘/어려 보랏빛//모란꽃 해으름 청모시 옷고름'.박목월의'목단서정'전문이다.정지용이 해질무렵을'해설피'로 쓴데 비해 이 시는'해으름'이라 했다.물론 시의 음악성을 위해서다.

시의 뜻과 음악성을 함께 노리며 우리말을 자유자재로 가장 잘 살리고 있는 시인은 서정주씨.'바보야 하이얀 멈둘레가 피였다'고 시'멈둘레꽃'에서 민들레를 멈둘레로 부른 서씨는 또다른 시에선'머슴둘레''미움둘레'등을 사용하고 있다.같은 민들레지만 바보같이 바라보면'멈둘레',머슴이 바라보면'머슴둘레',미운 시누이처럼 바라보면'미움둘레'가 되는 것이다.민족의 숨결과 혼결.살결,그리고 무늬결을 아로새겨 언어교항곡 같은 언어를 만들어 나가는 시인이 서씨다.

'징계맹경 외앳밋들 지평구 이야기는/그야말로 김치드락 말아 생모치 아작아작/씹어삼키는 목구멍 맛이라니'.고은씨의 시'진평구 이야기'한 부분이다.'징계맹경'이 김제 만경평야를 그쪽 토박이들이 부르는 말이라는 것은 차치하고라도'목구멍 맛'이라는데서 일반 민중언어의 맛과 멋,그리고 힘이 솟구쳐오른다.김치 한 가닥을 쭉 찢어 그대로 먹을 때 목을 간지럽히며 시원하게 들어가는 맛 자체를'목구멍 맛'으로 그대로 표현하는 시어 자체에서 민중의 삶의 맛이 그대로 드러난다.

유신 압제의 시대 김지하씨도 이런 민중적 시어를 빼어나게 사용하며 자유에 대한 타는 목마름을 씻어주었다.'희고 고운 실빗살/청포잎에 보실거릴 때 오시구려/마누라 몰래 한바탕/비받이 양푼갓에 한바탕 벌려놓고/도도리장단 좋아 헛맹세랑 우라질 것/보릿대춤이나 춥시다요'.'형님'이란 시 한 부분에서도 김씨는'실빗살,보실거리다,도도리장단,보릿대춤'등 우리의 고유어를 다양하게 짜넣으며 민중적 삶과 멋을 그리고 있다.'보릿대춤'은 여물어 바람에 흔들흔들하는 보릿대처럼 아무 격식없이 꺼덕꺼덕 추는 춤을 말한다.우리 시인들은 끊임없이 우리의 언어를 갈고 닦으며 민족의 혼을 지켜내고 있다.또 우리의 삶과 사회에 끊임없이 생명력과 멋,그리고 원초적 자유를 향한 갈망을 담아내고 있다.혼탁하고 바쁜 사회를 그대로 닮아 혼탁하고 살벌해진 우리의 일상어 속에서 아름답고 깊고 생명력 넘치는 시,그 시의 언어들이 계속 쓰이고 있음은 우리의 삶과 사회의 희망이 아직 가망없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경철 기자

<사진설명>

금세기 초부터 90년대까지 나온 우리의 시집 1만5천여권에서 시어(詩語)1만2천여개를 가려 시와 함께 해설한'한국 현대시 시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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