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신경진의 서핑차이나] 오바마 취임사 마오쩌둥 시 인용 논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마오쩌둥이 직접 쓴 사(詞) '심원춘·장사(沁園春·長沙)'

지난 8년간 계속된 미·중 밀월이 끝나가는 징후가 곳곳에서 포착된다. 오바마 미국 신임 대통령의 취임사를 둘러싸고도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가 요란하게 전개됐다. 중국은 먼저 오바마의 ‘공산주의’ 언급 부분을 삭제했고, 미국은 공식 중국어 번역문을 하루 만에 번복했다. 오바마가 마오쩌둥의 시를 인용했다는 중국의 언론보도가 나오자 취한 조치다.

◇오바마가 마오쩌둥 시 인용(?)=취임사 번역 번복은 미국의 지나친 ‘배려’가 발단이었다. 취임식 다음날인 지난 21일(현지시간) 미국 국무원 산하 국제홍보프로그램(IIP, International Information Programs)에서 번역한 오바마 취임사 미국 공식 번역문이 미국정부포털 중국어 사이트인 ‘미국참고(美國參考, http://www.america.gov/mgck)에 게재됐다. 취임사 마지막 문단 가운데 “희망과 원칙을 간직한 채 다시 한번 차가운 격류를 헤치고 언제 불어 닥칠지 모를 폭풍을 견뎌냅시다(With hope and virtue, let us brave once more the icy currents, and endure what storms may come)”를 '心懷希望和美德,讓我們再一次迎著寒風中流擊水,不論什麼風暴來襲,必將堅不可摧'으로 번역했다. 이를 본 중국인들은 깜짝 놀랐다. ‘차가운 격류를 헤치다’를 ‘물 한가운데 뛰어들어 헤엄치다’라는 뜻의 ‘중류격수(中流擊水)’로 번역한 것을 보고서다. ‘중류격수’는 마오쩌둥이 1925년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에서 상장(湘江)강을 내려보며 지은 사(詞) ‘심원춘·장사(沁園春·長沙)’ 말미에 나오는 구절이다. “어찌 기억하지 않겠는가? 물 한가운데 뛰어들어 헤엄치니, 그 물결이 달리던 배도 가로막았나니.(曾記否, 到中流擊水, 浪遏飛舟.)”가 원문이다. 싱가포르에서 발행되는 ‘연합조보(聯合早報)’가 이를 보고 오바마가 마오쩌둥의 시구를 인용했다고 처음으로 보도했다. 중국의 여러 매체들도 이 기사를 일제히 받았다. 중국 네티즌들이 의기양양해졌음은 당연지사.
오바마 대통령의 결연한 위기극복의 의지를 본 번역자가 젊은 시절 마오쩌둥의 시구절을 자연스럽게 떠올려 기지를 발휘했고, 결제라인에서도 이를 용인했던 것이다.

◇뒤늦게 바꾼 말도 마오가 쓴 구절=번역문이 중국에서 구설수에 오르자 미국은 다음날 ‘중류격수(中流擊水)’를 ‘중류지주(中流砥柱)’라는 성어로 바꿨다. 이곳말고도 4군데 정도의 '기술적 오류'를 수정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중류지주’는 황하(黃河) 삼문협(三門峽) 동편의 돌산인 지주산(砥柱山)을 말한다. 역경에 굴하지 않는 튼튼한 기둥을 뜻하는 성어다. 춘추시대 제(齊)나라 명재상 안영(晏嬰)이 쓴 ‘안자춘추(晏子春秋)’가운데 복숭아 두 개가 세 명의 용사를 죽였다는 ‘이도살삼사(二桃殺三士)’ 고사 가운데 나오는 구절이다. 임금을 모시고 황하를 건널 때 이무기를 칼로 베어 버린 고야자(古冶子)가 한 말 가운데 나온다. 워낙 유명한 구절이라 이 구절 역시 마오쩌둥이 그의 저서 ‘연합정부론’ 가운데 인용한 바 있다. “중국공산당원들이 중국인민에 대해 튼튼한 기둥 역할(中流砥柱)을 하지 않았다면, 중국의 독립과 해방은 불가능했다”라는 구절에 사용했다.
결국 미국이 수정한 말도 마오의 말이 되버린 셈이다. 뉘앙스로 본다면 고치기 전이 더 낫다.

◇‘취임사 공방전’ 승자는 누구?=미국이 번역문 자구를 고치기 전까지는 공방전은 중국측이 열세였다. 오바마가 취임사 도중 “우리의 앞선 세대들이 단순히 미사일과 탱크가 아닌 굳건한 동맹과 불굴의 신념으로 파시즘과 공산주의에 맞서 승리했음을 기억하십시오(Recall that earlier generations faced down fascism and communism not just with missiles and tanks, but with sturdy alliances and enduring convictions.)”라는 구절이 나오자 취임식을 생중계하던 중국 관영 CC-TV는 갑자기 통역을 중단하고 침묵으로 화면을 처리했다. 이후 중국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진 취임사에는 이 문장과 함께 “부패와 속임수, 강요된 침묵을 통해 권력에 집착하는 이들에게 고합니다. 당신들은 그릇된 역사 속에 살고 있습니다(To those who cling to power through corruption and deceit and the silencing of dissent, know that you are on the wrong side of history)”라는 구절도 빠진 채 게재돼 있다.
22일 중국 외교부 정례 브리핑에서 장위(姜瑜)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중국은 각국이 서로 존중하고 평등하게 대하는 방식으로 국가 간의 관계를 처리해 나가기를 희망한다"라며 오바마 취임사에 불편한 중국의 심기를 드러낸 뒤 "(누락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알지 못하며 중국 매체도 자주적인 편집권이 있다"며 중국 언론을 두둔했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xiaoka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