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수련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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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한여름.새벽 3시의 산사(山寺). 별이 무더기로 쏟아지고 기상 스님의'정구업진언…(靜口業眞言…)'천수경(千手經) 외는 염불소리가 청아한 목탁소리와 함께 퍼져나간다.이런 분위기에서 자신의 내면세계를 살펴보지 않을 자 있을까. 그래선지 짧은 기간이나마 혼탁한'속세'를 벗어나 산중에 묻혀보겠다는'수행자'들이 해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전국 주요사찰들이 여름철에 마련하고 있는'여름수련법회'가 불교 신자는 물론 일반인들의 발길까지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다.

수련법회의 가장 대표적인 사찰은 전남순천시송광면의 송광사.올해로 27회를 맞는 송광사 수련법회는 법정스님이 수련원장을 맡았던 지난 80년부터 널리 알려지게 됐다.경쟁률이 워낙 높다 보니 신청도 일찌감치 지난 10일로 마감했다.

지난해 6백명 모집에 1천5백여명이나 몰려 2.5대1에 이르자 올해부터는 한번 신청한 사람에게는 3년동안 신청을 못하도록 정했다.그런데도 7백명 모집에 1천4백여명이나 몰렸다.개중엔 연속신청 금지를 무시하고 여러가지 사정을 들어 다시 신청한 사람도 여럿 있었다.

송광사와는 달리 다른 사찰들은 수련회가 시작되기 며칠 전까지 신청을 받는다.해인사의 경우 오는 27일부터 8월16일까지 일곱차례에 걸쳐 일반.중고생.어린이.교직자등으로 나눠 총 9백50명을 수용할 계획이다.전남장성군의 백양사도 올해 처음으로 수련회를 연다. <표 참조> 송광사의 수련법회 일정을 보면 4박5일의 짧은 기간이지만'완벽한'출가(出家)경험을 얻을 수 있다.

입산뒤 스님들로부터 필요한 설명을 듣고 나면 그때부터 모든 실내 프로그램은 철저히 묵언(默言)으로 진행된다.부부끼리도 서로 말을 하지 않는다.말이 금지된다기보다 저절로 입이 다물어지게 된다는 것이 참가자들의 설명이다.

기상과 동시에 1백8배(拜)로 들어간다.오체투지(五體投地),즉 두 무릎.두 팔꿈치와 이마를 바닥에 붙이는 가장 낮은 자세로 1백8번 절을 올리고 나면 백팔번뇌가 씻기고 겸손한 마음이 저절로 생겨난다.

이어 1시간20분에 걸쳐 향을 피우고 예불을 끝내면 곧바로 좌선으로 이어진다.화두로는'이 뭐꼬'('이것이 무엇인고'의 줄임말.'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 마음이 도대체 뭐냐'는 뜻)가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이때는 간혹 스님들이 졸음을 이기지 못하는 수련인의 어깨를'딱딱'때리는 죽비소리와 호흡소리만 들릴 뿐이다.

밥 그릇 4개로 이뤄지는 바루공양(식사)도 특이한 경험이다.수행자의 앞쪽 가까운 곳에 놓인 그릇 2개가 밥그릇과 국그릇이고 그 앞의 왼쪽 그릇이 김치나 나물이 담기는 반찬그릇,오른쪽이 맑은 물을 담는 그릇이다.

반찬이나 밥은 절대로 남겨서는 안되며 그릇 닦은 물까지 숭늉으로 마셔야 한다.사찰수행에 대해서 귀동냥이라도 한 사람이라면 설거지 도구로는 배추김치 한잎이 최고라는 사실을 잘 안다.그것마저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버리면 그야말로 설거지는 손가락으로 해야 한다.

마지막 밤에는 9시부터 그 이튿날 오전1시까지 좌선과 오체투지를 1천80배나 한다.육체적으로는 더없이 힘든 수행이지만 현대사회의 온갖 스트레스와 번뇌에서 벗어나게 만든다.수련회를 경험한 이들 중에는 오히려 그런 육체적 고통을 그리워하는 이들도 많다.이외에도 사찰마다 묵언정진.암자순례.강의 등을 곁들이고 있다.

대구 영남전문대 전태옥(39.심리학)교수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송광사 수련회에 신청서를 내놓고 떨어질까봐 조바심이다.지난해만 해도 좌선이 뭔지도 몰랐던 전교수는“눈만 뜨면 바깥 일에 몰두해야 하는 현대생활에서 우리 마음속을 찬찬히 들여다 볼 기회를 제공한다”고 사찰수련회 옹호론을 펼친다.전교수는 지금도 비종교인이라는 입장이지만 좌선만은 집에서도 계속중이다.

91년과 96년에 이어 올해 세번째로 송광사 수련회에 참가를 신청한 인천의 전성태(38.치과의사)씨도 수련회에 참가한 뒤로 환자를 대하는 태도와 주변 사물을 보는 시각이 변하고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고 강조한다.전씨는 사찰수련회가 직장인에게 주어지는 안식년처럼 재충전의 기회가 된다고 덧붙인다. 정명진 기자

<사진설명>

지난해 송광사에서 열렸던 여름수련회의 바루공양광경.그릇 4개로 밥한톨까지 다 비우고 앉은 자리에서 설거지까지 끝내고 나면 물욕이 어느정도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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