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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감독과 PD 한 명, 자본,시간의 벽을 넘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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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호 03면

1 신동헌 감독을 중심으로 시계 방향으로 류지나·김일현·이혜영·선경희·이은미씨. 곽인근씨는 개인 사정으로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애니메이션은 힘든 작업이올시다. 꾀 부리지들 말고 열심히 그리고 또 그립시다.”
팔순 노장의 말은 묵직한 화살이 되어 객석을 향해 날아들었다. 무대에 올라 꽃다발을 품에 안은 다섯 젊은이는 다시 한번 심호흡을 했다.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1967)을 만든 신동헌(82) 감독 앞에서 이들은 ‘나는 왜 애니메이션을 시작했나’라는 초심(初心)으로 돌아갔다.

제2회 신동헌 애니메이션 어워드 수상한 장편 애니 ‘제불찰 씨 이야기’ 팀

21일 오후 서울 남산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서 제2회 신동헌 애니메이션 어워드 시상식이 열렸다. 이 상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상징인 신동헌 감독을 기리고 후학들을 격려하기 위해 2007년 처음 제정됐다. 2회 대상작은 ‘제불찰 씨 이야기’(2008). 가수 이적의 소설 『지문사냥꾼』에 실린 동명의 단편을 64분짜리 영상으로 옮겼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제작연구과정 1기생(선경희·김일현·이은미·류지나·곽인근·이혜영)의 공동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한국 애니메이션사에서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평균 제작비가 25억원가량 드는 것으로 알려진 장편 애니메이션을 그 10분의 1인 2억5000만원에 만들었다. 또 보통 3년 이상 걸리지만 이번엔 1년2개월 만에 완성했다. 다섯 감독과 PD 한 명의 공동 작업이라는 것도 드문 일이다.

“첫 제작 프로젝트였어요. 기간과 예산(3억원)이 미리 정해져 있었죠. 우리는 만들어 내야 했어요. 해내지 못하면 프로젝트 자체가 없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거든요.” 프로듀서를 맡은 선경희(36)씨 얘기다.

2 ‘제불찰 씨 이야기’ 중 한 장면 3 모형 전문 제작사 샤이닝 스타의 황상정 대표가 제작한 어워드 트로피. 신동헌 감독의 대표 캐릭터 ‘홍길동’을 형상화했다

움직임이 자연스러운 2D 드로잉이나 화려한 3D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션으로는 예산과 기일을 맞출 수 없었다. 디지털 컷아웃 방식에서 방법을 찾았다. 컷아웃은 그림을 오려 인형을 만들고 그 움직임을 통해 동작을 만들어 내는 방식. 1초에 24장이 필요한 드로잉 방식보다 움직임이 다소 거친 대신 제작비는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원작의 몽환적 분위기를 독특한 질감으로 표현할 수 있는 컷아웃 방식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어요.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전달할 것이냐가 가장 중요하거든요.”(류지나 감독)

무엇보다 공을 들인 것은 스토리였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고질병으로 지적돼 온 느슨한 이야기 구조를 쇄신해야 했다. 시나리오를 새로 쓰는 대신 원작을 각색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텍스트를 어떤 이미지로 풀어 낼 것인가. 다섯 감독과 한 명의 PD는 모두 생각이 달랐다. “생각들을 한데 묶는 일이 가장 힘들었어요. 다수결로 풀 문제는 아니었거든요. 처음엔 서로 들을 준비가 안 돼 있었죠. 엄청 싸우고 많이 얘기하면서 작품은 점점 모습을 찾아갔어요.”(김일현 감독)

다섯 감독은 각자의 장점대로 역할을 분담했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류지나(29) 감독은 배경 파트를, 인물에 애정이 많은 이은미(30) 감독은 캐릭터를 담당했다. 김일현(32) 감독은 컴퓨터 합성 툴을 다뤄 본 노하우를 십분 활용했고, 움직임에 관심이 많았던 곽인근(29) 감독은 애니메이팅을 맡았다. 얌전하면서도 자기 주관이 뚜렷한 이혜영(28) 감독이 전체를 총괄했다.

지난해 7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제불찰 씨 이야기’는 제5회 두바이 국제영화제 출품에 이어 3월에는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 독립영화 발전을 위해 제작진에 장학금을 지급한 CJ엔터테인먼트가 배급에 나서기로 했다.
이들이 이번 작품을 통해 얻은 것은 무엇보다 자신감이다. “자본과 시간은 사실 어려운 문제죠. 하지만 이를 극복하는 것은 사람이라는 점을 이번에 똑똑히 깨달았어요. 자기 일이 끝나면 다른 사람을 돕는 모습을 보여준 스태프의 뜨거운 열정은 두고두고 큰 힘이 될 것입니다.”(선경희)

한편 이날 시상식에서 특별상은 ‘웨이홈’의 오수형·이정헌 감독이, 공로상은 유성웅(67) 전 신원 프로덕션 대표가 수상했다. ◇제불찰 씨 이야기=주인공은 귀지 청소 일을 하는 제불찰.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어수룩한 인물이다. 회사 사장의 음모로 이상한 알약을 먹고 벌레만 해진 제불찰은 사람들의 귀지를 제거하다가 그들의 머릿속 기억 창고 속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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