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 규제·개발은 30년 부동산 정책 압축판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98호 04면

판교 신도시가 들어선 곳은 ‘널다리’ ‘너더리’로 부르던 곳이다. 일제 때 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널빤지 판(板)’ ‘다리 교(橋)’를 취해 우리말 이름을 한자로 옮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넓은 들(廣野)’을 잘못 옮겼다는 지적도 있다. 판교는 서울에서 더 먼 분당·용인이 도시화한 뒤에도 개발과 담을 쌓은 금단의 땅이었다. 그러나 이 땅은 30년 부동산 정책사를 투영하고 있다.

널다리가 신도시 되기까지

정부는 1968년 성남시에 서울 인구를 분산시킨다며 ‘광주 대단지’를 만들었다. 하지만 위성도시 성남조차 확산 일로였다. 76년 3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예고 없이 성남을 시찰한 뒤 불호령을 내렸다. “성남 인구가 목표를 넘어 27만 명을 초과했다. 앞으로 자연 증가 외에는 인구가 늘지 않도록 도시계획에 따른 미입주 지역에 한해 건축을 허가하는 방식으로 엄격히 통제하라.” 당시 대통령의 지시는 법이었다. 달포가량 지난 5월 4일 판교 등 남단녹지(6677만㎡)는 이른바 ‘5·4조치’로 건축행위가 전면 금지된다. 남단녹지는 그린벨트가 아니었으나 무기한 그린벨트나 다름없는 규제를 받았다.

‘금단의 땅’에서 ‘제2 강남’으로
82년 1월 한국형 디즈니랜드를 판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맞은편 야산 50여만 평에 세우는 방안이 흘러나오고, 83년 들어 ‘녹지가 풀린다’는 소문이 돌며 땅값이 치솟았다. 그러나 소문으로 끝났다. 남단녹지에 처음 손댄 것은 89년 분당 신도시 개발 때다. 신도시 편입 지역 중 돌마면(분당·정자 등 9개 동), 낙생면(경부고속도로 동쪽 5개 동)은 남단녹지였다.

분당 개발이 마무리될 무렵인 94년부터 판교 토박이들은 개발을 요구했다. 성남시도 이 무렵 판교 일대를 신시가지 예정 부지로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는 5대 신도시 개발로 집값이 안정되고, 신도시 뒤탈이 워낙 많아 신도시의 ‘신’자도 꺼내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대신 용인 등 준농림지가 개발 압력을 받고 마구잡이로 개발됐다.

판교에서 신도시설이 다시 솔솔 흘러나온 것은 외환위기 직후다. 98년 5월 성남시는 녹지로 묶여 있는 판교 일대를 주거용지로 바꾸는 내용의 도시기본계획을 확정했다. 99년 3월에는 이곳에 건축제한 시한(2000년 12월 31일까지)이 걸렸다. 신도시 개발은 99년 들어 국토연구원이 타당성 조사에 들어가는 등 진척을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99년 7월 이건춘 건교부 장관이 “더 이상의 수도권 집중을 막기 위해 판교 일대에 대한 택지개발은 절대로 승인해 주지 않겠다”고 밝히면서 개발설은 주춤했다. 다시 불이 붙은 것은 개발에 적극적이던 토지공사 김윤기 사장이 2000년 1월 신임 건교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다. 땅값이 치솟자 건교부는 “김 장관의 개인 소신일 뿐”이라고 물러섰다. 그러나 개발 압력을 무작정 억누르기 어려웠고, ‘건설경기 부양’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커졌다. 건교부는 2000년 10월 국토연구원의 정책 건의 방식으로 신도시 개발 굳히기에 들어간다.

2001년 이후 11번 계획 변경
물꼬가 트였으나 이번에는 경기도가 베드타운화와 수도권 남부 교통난을 이유로 반대했다. 정부·여당은 2000년 12월 당정협의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그해 말 끝나는 판교의 건축제한 조치를 2001년 말까지 1년간 연장했다. 정부·여당이 판교를 ‘저밀도 전원도시’로 개발한다는 원칙에 합의한 것은 2001년 5월이었으나 곧 반대에 부닥쳤다. 경기도가 벤처단지 확대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벤처단지 논란은 건교부 안보다 10만 평 늘린 20만 평으로 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판교는 마침내 2001년 12월 택지개발예정지구로 지정됐다. 주택 1만9700가구를 2005년 12월까지 분양한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그러나 확정된 개발 계획마저 시장 상황에 따라 오락가락했다. 2001년 12월 실시계획 승인 후 지난해 12월까지 11차례나 변경됐다. 첫 변경은 2003년 9월 당정협의에서 판교 주택 공급을 1만 가구 많은 2만9700가구로 늘리고, 분양 시기를 2005년 상반기로 앞당긴 것이다. 집값 급등에 대응해 강남 대체 주거지로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이 먹혀 들었다.

이어 2004년 12월 실시계획 승인 과정에서 임대주택을 종전 5940가구에서 1만661가구로 늘렸다. 노무현 정부의 색깔을 보탠 것이다. 하지만 분양 주택이 줄고, 분양가가 3.3㎡당 2000만원을 웃돌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판교발 집값 대란이 벌어졌다. 2005년 5월 환경부의 반대로 공급 가구수가 10%가량 줄어든 2만6800가구로 재조정돼 집값은 더 치솟았다. 노 대통령은 6월 17일 폭탄선언을 한다. “판교 신도시에 대해 공영개발, 중대형 건설 등의 말이 나오니 다시 검토해 보자”며 중대형 택지분양을 불과 사흘 앞두고 중단 결정이 내려졌다. 이래서 나온 게 8·31 대책이다. 중대형 물량은 다시 3000여 가구 늘어난다. 분양 주택은 최종적으로 2만9263가구로 확정됐다.

판교 개발의 초점이 마구잡이 개발 방지→과밀 억제→집값 안정→무주택자 주거 안정→환경보호→분양가 낮추기 등으로 바뀐 셈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다시 시장 침체에 따라 규제를 푼다며 전매 제한 등을 대폭 완화했다.

왜 이런 우여곡절이 판교에서 일어났을까. 공적 규제가 없었다면 진즉 시가지로 탈바꿈했을 노른자위였고 강남과 분당 사이에서 제2 강남, 제2 분당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한껏 받은 땅이었기 때문이다. 호사다마였던 셈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