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공주 로맨스, 허구라고 단정할 순 없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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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호 14면

논란의 중심에는 한 장의 금판이 있다. 사찰을 창건한 주체를 밝히고 건립 사유 등을 기록해 사리함과 함께 봉안한 ‘사리봉안기’다. 이 금판에 음각으로 새겨진 “我百濟王后佐平沙<4E47>積德女(나 백제의 왕후 좌평 사택적덕의 딸)”라는 구절이 논란을 일으켰다.

미륵사석탑 발굴 이끈 김봉건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일연은 ‘삼국유사’ 제2권에서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결혼에 얽힌 사연을 ‘서동요’와 함께 전한 뒤 미륵사를 ‘무왕의 왕후’가 세웠다고 기록했다. 미륵사가 ‘선화공주가 세운 사찰’로 후세에 전해진 이유다. 그런데 이번에 발굴된 봉안기에 기록된 ‘좌평’은 백제의 벼슬이고 ‘사택’은 백제 8대 성씨(姓氏) 중 하나다.

-무왕의 비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관리의 딸이었고, ‘서동요’는 허구였단 말인가.
“지금 상황에서는 서동요 설화가 거짓이라고 단정하기 매우 어렵다. ‘선화공주가 미륵사를 세웠고 삼국유사가 옳았다’는 증거가 나오길 고대했던 반작용인지 언론에서 허구일 가능성부터 너무 단정적으로 부각시킨 것 같다. 여러 가능성이 남아 있다.”

-문제의 구절을 ‘나 백제의 왕후이자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 아니라 ‘나 백제의 왕후와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나.
“아니다. 한문의 특성 때문에 일부 해석에 논란이 있었지만 명문(銘文) 전체의 맥락으로 볼 때 ‘백제 왕후=좌평 사택적덕의 딸’로 보는 게 맞다.”

‘서동요 허구 논란’을 불러일으킨 ‘사리봉안기’. 금판에 붉은 글자로 “我百濟王后佐平沙<4E47>積德女(나 백제의 왕후 좌평 사택적덕의 딸)” 구절이 선명하다.

-그렇다면 선화공주가 무왕의 왕후라는 가설이 어떻게 가능한가.
“무왕의 재위기간(600~641년)이 40여 년이다. 왕후가 여럿일 수 있다. 또 미륵사는 중앙과 동서의 세 가람이 합쳐진 형태로 된 아주 큰 사찰이었다. 경주 황룡사지보다 넓다. 한꺼번에 짓지 않고 20~30년 걸려 지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번에 유물이 발굴된 곳은 서탑인데 서쪽 가람은 백제 귀족의 딸인 후대 왕후가 짓고 중원은 선대 왕후인 선화공주가 세웠다는 가설도 가능하다. 실제로 가운데 목탑과 동·서탑은 양식도 다르고 시대 차이가 난다.”

-애초에 ‘삼국유사’가 설화 성격이 강한 야사(野史)고 삼국통일 수백 년 뒤에 쓰였기 때문에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많다.
“이번 발굴은 오히려 삼국유사의 정확성을 입증했다고 본다. 이번에 발견된 봉안기에 따르면 건립 시기가 기해년(639년)으로 무왕 때 미륵사가 건립됐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뒷받침한다. ▶미륵 삼존을 기려 회전과 탑과 낭무를 세 곳에 세웠고 ▶연못을 메워 건립했으며 ▶사자사(현재의 사자암) 가는 길 용화산 아래에 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도 유적과 들어맞는다.”

‘처녀탑’엔 1370년 전 흔적까지 그대로
미륵사지 석탑 유물이 발견된 것은 14일이다. 5일간 밤샘 작업 끝에 유물 수습을 끝내고 19일 언론 등 외부에 공개했다.

-유물 발굴을 예상했나.
“14일 발굴 소식을 전화로 듣고 깜짝 놀랐다. 미륵사지 석탑은 가장 크고 오래된 석탑이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옮겨가는 때 만들어져 목탑 구조에 재료만 돌이다. 목탑의 경우 초석(礎石)에 구멍을 파서 사리를 봉안하기 때문에 만약 사리가 봉안됐다면 지하에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1층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정말 놀랐다.”

-보존 상태도 뛰어나다고 들었다.
“그렇다. 금으로 만든 사리기에 세공한 구슬 무늬가 생생히 살아 있다. 무엇보다 사리봉안기의 금판에 붉은 글자가 손상 없이 너무 또렷해서 깜짝 놀랐다. 처음 봉안했던 그대로 손을 안 탔다. 고분에 비유하자면 ‘처녀분’인 셈이다.”

-탑신에 도굴꾼의 흔적이 있었다는데.
“맞다. 하지만 워낙 돌덩어리가 무거워 사리기와 봉안기 등 유물이 들어 있던 1층까지 손을 못 댄 것 같다. 회를 발라 밀봉 상태로 보존돼 초석 위에 먹으로 그은 선까지 또렷이 남아 있었다. 탑의 중심을 맞추기 위해 먹선을 그어 놓았던 흔적까지 그대로 보존된 것이다.”

김 소장은 연방 두 주먹을 포개어 가며 초석과 탑신이 쌓인 형태를 기자에게 설명했다. 먹선의 모양도 허공에 손가락으로 그어보였다. 아직도 발견 당시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모습이었다.

-무령왕릉 이후 최대의 발견이라고들 한다.
“그렇다. 유물의 풍부함과 우수성, 보존 상태 등 독보적이다. 처음부터 이 일을 함께 한 김현용 학예사에게 “뭐 좋은 꿈꾼 거 없느냐”고 물어봤을 정도다. 실제로 김 학예사 부인이 로또 당첨되는 꿈을 꿨단다. 그 꿈 꾸고도 복권을 안 샀는데 그 덕에 유물을 발굴한 게 아니냐고 우리끼리 얘기했다(웃음).”

사리기, 이르면 올여름 일반에 공개
‘로또 당첨’보다 값진 성과를 이루기까지는 어려움도 많았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해체 작업에 들어간 것이 2001년 10월. 국보 제11호의 중요성을 감안해 외부 업체에 발주하지 않고 문화재연구소가 최고의 석공을 직접 채용해 진행했다. 현장에 간이 숙소를 짓고 밥을 해 먹으며 직원 12명이 상주했다.

-원래 2007년까지 복원을 마무리할 예정 아니었나.
“계획보다 훨씬 시간이 많이 걸렸다. 중간중간 시멘트로 땜질해 놓은 상태라 해체 중에 무너질까봐 보강 작업을 병행해야 했다. 또 3차원 레이저 스캔 장비까지 동원해 하나하나 다 기록으로 남겨 가며 작업했다. 이렇게 공들여 진행하느라 작업이 늦어지자 2007년 검찰 조사까지 받았다.”

-검찰 조사라니.
“당시 다른 기관에서 발굴 비용을 횡령한 사건이 있었다. 우리도 일부러 작업 기간을 늘린 게 아닐까 하고 조사한 것 같다. 계좌까지 다 조사받고 결국 무혐의가 입증됐지만 한 달 정도는 아무 일도 못 했다. 그런 오해까지 받을 정도로 천천히 끈기 있게 작업을 진행한 끝에 결실을 보게 됐으니 감격이 더 컸다.”

-다른 어려움은 없었나.
“인력이 가장 큰 문제였다. 솔직히 현장도 너무 멀고(2001년 당시 문화재연구소는 서울에 있었다. 현재 위치는 대전이다) 10년 이상 걸리는 사업인데 (정규직 인원 제한 때문에) 비정규직을 쓰다 보니 자꾸 사람이 중간에 바뀌어 차질이 생겼다.”
문화재 분야의 인력난은 고질적인 문제다. 지난해 12월 문화재보존센터가 완공됐지만 정작 인력이 확충되지 않아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이곳에서 진행 중인 미륵사지 유물 보존 작업도 예상보다 시간이 걸릴 우려가 있다.

-발굴된 유물은 언제 볼 수 있나.
“원활하게 진행된다면 사리기·봉안기 등 금속으로 된 유물은 6개월, 천이나 가죽으로 된 것은 1년6개월~2년 뒤 공개가 가능할 것 같다. 19일 유물을 공개할 때 일반인이 엄청나게 몰렸다. 부산에서 찾아온 40대 여성도 봤다. 관심이 뜨거운 만큼 먼저 작업이 끝나는 금속 유물부터 공개할 계획이다. 유물이 들어 있던 빈 공간은 지금도 미륵사터에 가면 볼 수 있다.”

올여름, 백제의 신비를 만날 수 있을까.



김봉건 소장은
서울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고건축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3년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공예연구실에서 연구관으로 시작해 2002년 최연소 문화재연구소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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