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64강만 상금 … 무제한 오픈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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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비씨카드배는 프로기사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 친숙하게 여겼던 ‘대국료’가 한 푼도 없다. 오직 64강 이상에게만 상금이 지급된다. 무제한의 오픈전이기에 한국은 물론 외국의 아마추어도 참가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연구생’의 참가가 허용된다. 실력은 프로 9단을 이길 만큼 뛰어난데도 그라운드에 나서지 못한 채 관중석에서 구경만 해야 했던 연구생들이 사상 처음 기전에 나갈 수 있는 길이 터진 것이다.

상금제와 오픈전 얘기가 나온 지는 벌써 5년 전이다. 많은 반대가 있었다. 프로기사는 바둑을 두면 지든 이기든 돈(대국료)을 받았고 프로 자격증을 지닌 사람은 평생 시합에 나갈 수 있었으며 이게 프로와 아마의 분명한 차이였다. 한데 상금제와 오픈전은 이런 ‘선’을 무너뜨려 프로의 자존심이 크게 손상된다고 생각했다. 소수의 일류기사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다 죽는다고 성토했다. 젊은 기사들조차 막강 실력의 연구생들과의 경쟁은 두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상금제는 지난해 11월 한국기원 프로기사회에서 투표에 부쳐져 찬성 124, 반대 34, 기권 5라는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유창혁 9단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들의 줄기찬 설득이 주효했다. 경쟁의 극대화를 통해 대회의 재미를 높이고 스폰서(기업)의 홍보효과를 높이고 스타 기사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 그렇게 바둑의 덩치를 키운 뒤 일류는 메이저 대회, 2류는 마이너 대회, 그 외는 보급 식으로 역할 분담을 하자. 프로 전부가 토너먼트 선수가 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게 설득의 주 내용이었다. ‘위기’라는 공감대가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냈다. 일본에서 시작된 침체의 파도가 한국으로 밀려오고 있었고 세계 최강의 타이틀을 지닌 한국에서도 젊은 바둑팬이 급감하고 있었다. 유소년 바둑인구의 유입이라는 물줄기가 줄어들면 바둑이라는 ‘강’은 언젠가 말라 버릴 것이다. 당장의 위기는 경제상황과 맞물려 스폰서들이 바둑을 떠날 조짐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 시점에서 기득권을 다 털어버리고 상금제와 오픈전이란 쓴 약을 마시기로 작정한 한국기원 프로기사들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낸다. 한국기원은 기전 규모가 5억원 이상만 되면 어느 기전이나 이 같은 변신이 가능하다고 밝히고 있다. 바둑은 대세를 보는 게임이고 미래를 예측하며 수를 궁리하는 게임이다. 행사장에서 만난 유창혁 9단은 이번 비씨카드배 출범이 중국과 일본에도 작용해 국경을 넘는 더 큰 리그가 탄생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꿈을 가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세계바둑리그든 동북아 바둑리그든 일단 누군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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