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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 이태백 ⑪] 자신감은 좋은데 지나쳐서 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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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직장인 두명과 맥주를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기자와 몇년째 알고 지내는 동년배다.

A팀장은 85학번으로 서비스업종의 10대그룹 계열사 인사담당자다. 물론 위로 부장과 이사가 있기는 하지만 채용과 교육분야의 실무자다. 87학번인 B씨는 섬유분야 중견기업의 기획팀 과장이다.

회사가 외환위기때 부도 위기에 몰렸다가 주력상품을 바꾸는 구조조정 끝에 최근 가까스로 살아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들로부터 왜 기업이 채용을 기피하는지, 현장에서 보는 20대의 문제는 무엇인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솔직한 속내를 들어봤다. 본인들의 요청에 따라 회사와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 왜 기업들이 채용을 기피하지요?

A팀장= “기본적으로 일자리가 없어요. 미래학자 레프킨이 ‘고용없는 성장’ 이야기를 한게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한국은 그동안 외환위기도 겪었고, 구조조정이다 아웃소싱이다 하며 있는 사람도 자르는 판인데. 거기에다 제조업은 중국을 거쳐 베트남으로 까지 나가고 있으니 국내에 일자리가 늘어날 턱이 없죠.”

- 다 아는 공자님 말씀은 빼고(웃음) 일선에서 느끼는 것 좀 말해주세요.

B과장= “뭐랄까. 30대 중반이상인 기업의 과장, 부장급에서 신입사원 선발에 소극적인 면이 없지 않은 것 같아요. 오히려 경영진에서는 ‘신입 좀 많이 뽑으라’고 하는데 현장 부서에 인력 수요 알려달라 그러면 ‘필요없다’는 식이죠. 사람 모자라고 힘들지만 ‘월급 싸고 팔팔한 아래 직원들 치고 올라오면 내 자리가 없어지는 게 아닐까’ 뭐 이런 느낌일까요. 몇년씩 같이 고생한 사람끼리 잘 해보자, 정 일손 부족하면 임시직이나 외부 용역주면 된다는 겁니다.”

A팀장= “일부러 기피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입 들어오면 몇년씩 일 가르치는 것도 힘들고, 말도 잘 안 듣고(웃음), 직원 늘어나는데 승진 못하면 눈치 보이고, 뭐 그런 면은 있지요.”

- 그럼 ‘이태백’은 능력은 있는데 앞에 꾸물대는 X차 때문에 내달리지 못하는 불행한 세대네요.(웃음)

A팀장= “꼭 그렇지만은 않고…. 내가 보기에는 지금 취업난을 겪는 20대 후반 세대가 좀 과대평가 됐다는게 더 정확한 것 같아요. 이 친구들이 크게 보면 91학번에서 97학번 정도인데, 물론 군대 갔다 온 남자 기준으로요, 386이나 40대 이상 선배들에 비해서 치열한 맛, 결사적인 맛이 없어요. 다들 영어 잘하고 컴퓨터 잘 다룬다고 내세우는데 실제로 보면 영어로 전화나 레터도 제대로 못 쓰더라구요. 인터넷을 잘 이용하고 워드도 빠르지만 기획안 하나 제대로 못 만들고 여기저기서 짜깁기해 가져오는데 실무능력이 뛰어나다고 하기에는 좀….”

B과장= “같은 90년대 학번이라도 초반과 중반 이후가 좀 달라요. 90년대 초반 학번은 자칭 ‘저주받은 세대’라고 하더군요. 민주화 이후 대학 다니면서 장기 호황에 해외여행 자유화, 인터넷 보급 등으로 좋은 시절을 보내다가 막상 취직할 때가 되니 외환위기로 직격탄을 맞은 거지요. 안됐다는 생각은 드는데 냉정하게 말해서 겉멋만 들렸다고 할까, 준비가 덜 된 것 같아요. 나보다 나을 것도 없는 기성 세대들이 부정, 부패로 단물 다 빨아먹고 경제를 망쳐놔서 내가 피해본다, 뭐 이런 식이지요.”

- 20대 초·중반은 좀 다른가요?

B과장= “아무래도 외환위기를 직접 봤으니…. 대학때부터 취업 준비에 몰두하고 이런 저런 준비는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학점, 토익 이런데 치중하다 보니 종합적인 사고는 좀 부족한 것 같고요, 스스로는 창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 얼굴 맞대고 이야기해 보면 굉장히 획일적이라는 느낌을 받아요. 특히 방송이나 인터넷의 영향인지 기성 세대가 한 일은 무조건 뒤집기만 한다는 식의 의견을 대안으로 내놓고, 나도 학교 다닐때는 데모깨나 했다는 편인데….”

A팀장= “20대 구직자들의 실무능력 부족은 아킬레스건이예요. 우리때만 되도 아무것도 몰라도 취직하면 선배들이 데모하느라 고생했다며 2~3년은 일을 가르쳤어요. 지금 기업에서는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인력을 원해요. 선배들도 바쁘다보니 하나하나 알려줄 수 있는 입장은 아니고. 스스로 해결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어요.”

- 그럼 어떤 방법으로 준비해야 할까요?

A팀장= “자신만의 장점을 개발해야 되요. 아닌말로 중국어로 전화할 수 있고, 중문 컴퓨터를 다룰 수 있는 지원자는 안 뽑을 이유가 없어요. 중국어 아니라 스페인어를 하던가, 아랍어를 하던가, 남들 안하는 것을 해야지요. 하다 못해 학교 다니면서 방학때마다 인턴을 했더거나 작은 것이라도 프로젝트에 참가했다거나 하면 눈에 확 띄지요. 신입사원 중에는 방학마다 중국 지사에 가서 ‘아무거나 일 시켜주고 밥하고 잠자리만 달라’고 매달렸던 친구도 있어요. 지사장 추천장 들고 지원했는데 안 뽑아줄 수 있나요. 남들 다하는 학점 4.0에 토익 900점에 워드 몇급 이런거 아무리 들고 와 봐야 1차 서류심사에 떨어지지 않는 정도지요.”

B과장= “회사가 외환위기때 고전한데다 대기업이 아니라 그런지 생각만큼 고급 인력이 많이 오지 않아요. 서류는 100대 1, 200대 1 경쟁률로 들어오는데 좀 괜찮다 싶으면 면접에 안 나타나고, 뽑아 놓으면 출근 안하고, 두어달 출근하다 사표내고. 인사파트에서는 ‘아예 관상 봐서 충성심 높은 친구를 고르고 말지’라는 농반 진반의 푸념이 나오는 판입니다.(웃음) 기업 입장에서는 ‘내 회사 사람이다. 오래 같이 갈 식구다’ 이런 식의 안정감도 무지 중요한데 딱 눈치를 보면 갈 데 없어서 온 것이 티가 나요. 수십년 기업에서 보낸 회사 부장급 정도 되면 이 정도는 딱 2~3분 얘기해 보면 알아요. 도대체 면접 오면서 회사 주력 분야가 뭔지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됩니까. A형은 잘 모르겠지만 그럴때마다 ‘구멍가게’의 비애를 느껴요.(웃음)”

- 거기가 구멍가게면 웬만한 회사들은 다 좌판 노점상인가요.(웃음) 너무 젊은 세대에 부정적인 것 아닌가요?

B과장= “뭐, 하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그런데 솔직히 ‘고생 좀 더 해야 된다,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은 게 사실이죠. 직장생활 10년씩 하다 보면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을 뼈져리게 느끼는데 직장 없다고 아우성치는 젊은 세대 중에 얼마나 그런 점을 이해하고 있는지…. 기획 분야에 입사 한 후배가 있는데 처음에 총무 업무를 맡겼더니 그러더라고요. ‘제가 뭐 영수증 처리나 하려고 들어온지 아십니까?’ 아니 무협지를 봐도 입산하면 밥짓고 빨래하고 삼년인데, 아닌말로 기획 하려면 인사·영업·재무 다 알아야 할 텐데 영업 일선에라도 발령내면 당장 사표라도 낼 기세더군요. 이런 모습 보다 보면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죠. 아니면 내가 ‘회사형 인간’으로 변한 건가.(웃음)”

A팀장= “뭐, 나쁜 면만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요. 일단 어릴때부터 먹고 사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니 위축된 구석이 없고. 인터넷 덕에 정보도 빠르고. 권위주의에 대해 고개를 숙이기 보다는 당당하게 고쳐 나가려는 편이고. 나보다 나은 구석이 많지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 셋이 다시 시험보면 지금 회사에 들어간다는 보장이 없을 걸요. 서류 심사라도 통과하면 다행이지.(웃음) 그런데 좀 넓은 마음과 시각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월드컵 4강 이후 특히 그런데요, ‘이만 하면 우리도 됐다’는 자신감을 가진 것은 좋은데 너무 지나쳐서 탈이랄까. 젊은 세대의 경쟁자는 국내에만 있지 않은 만큼 미국·영국·중국 그리고 일본의 젊은이들은 무슨 생각으로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 기본적으로 경기가 풀려야 해결될 문제인데. 휴학이나 유학하며 소나기는 피해가는 것이 어떨까요?

A팀장= “절대로 피해야 합니다. 학계로 나가거나 아예 고시에 뼈를 묻는다면 모를까 취업을 생각한다면 넌센스입니다. 차라리 중소기업이라도 들어가서 경력을 쌓는 것이 백번 나아요. 2~3년 있다가 경기가 좋아지면 기업들이 나이순으로 뽑는답니까. 오늘 직장 못 구하면 내일은 더 젊은 친구들까지 합세한 틈바구니에서 경쟁해야 해요. 기업 입장에서는 한살이라도 어린 편이 좋구요. 일단 이력서에 불분명한 공백이 있으면 별로 좋게 보지 않습니다. 아르바이트나 하면서 좋은 자리를 기다린다, 특별한 경우 아니면 대부분 실패합니다. 무조건 직장부터 잡아라, 이게 제 결론입니다.”

B과장= “동감입니다. 중소기업은 안 간다, 지방 근무는 싫다, 일이 너무 힘들다, 이런 식으로 허송하다가는 실업 상태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동안 적지 않은 사장·임원들이 직원들을 종 부리듯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담급니까. 어차피 한국에서 안정된 직장이란건 없습니다. 공무원 정도일까. 앞으로 어느 회사에서 일하냐, 정규직이냐 아니냐, 이런 부분은 큰 의미가 없어요. 무슨 일을 하느냐가, 자기 몸값을 어떻게 올리느냐가 중요하지요. 취업할 때도 전처럼 무슨 그룹, 무슨 회사 이런 것보다 자신이 갈 길을 정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요. 졸업때 닥쳐서 고민해야 늦습니다. 대학 4년간 이 부분을 결정하고 졸업 후에는 ‘목표를 향해 돌격 앞으로’ 하는 거지요. 어이쿠, 또 군사문화의 잔재가 튀어나와 버렸네….(웃음)”

- 청년 실업은 쉽게 해결책이 보이지 않으니 더 답답하네요. 어쨌든 긴 시간 감사합니다.

김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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