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주영씨 오랜만에 중편 '홍어' 발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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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대형작가 김주영(金周榮.58)씨가 오랜만에 아담한 중편소설을 발표했다.김씨는 장편.대하 소설만 발표해오고 있는 작가.보통 5권을 넘는 작품의 길이는 물론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그들이 엮어가는 이야기 역시 굵직굵직 흐르고 문체도 활달하고 걸쭉해 우리시대 최고의'대형작가'로 꼽힌다.

그런 金씨가 최근 나온'작가세계'여름호에 중편으로는 15년만에 발표한'홍어'는 눈에 함빡 갇힌 산골 마을,어릴적 고향을 흑백 사진에 담은 양 고즈넉하다.시간을 잠재운 그 아슴푸레한 풍경속에서는 누렁이의 인정 그리운 컹컹 소리가 새어나오면서 사람살이의 속내가 의미와 이야기 이전의 시(詩)적인 세계로 담겨있다.

“연줄을 끊고 달아나는 가오리연이 깝죽깝죽 턱을 들까불면서 먼 산등성이 뒤쪽으로 속절없이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문득,오래전 우리 두 사람을 버리고 타관으로 떠나버린 아버지를 생각하곤 했다.”'홍어'에는 먼 세상밖으로 연을 날려보내는 14세 소년이 화자(話者)로 나온다.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리는 어머니는 연을 끊어먹을 때마다 정성스레 가오리연을 만들어주곤 한다.부엌 문설주에는 가오리연의 본을 뜬 말린 홍어를 걸어놓고 들며나며 바라보고….읍내 아낙네와 눈이 맞아 5년전 떠난 아버지 별명은'홍어'였다.

밤새 눈이 퍼부은 어느날 난데없는 비렁뱅이 처녀가 찾아든다.큰 눈에 산짐승이 민가로 내려오듯 부엌을 찾아 든 소년보다 네댓살 위인 듯한 그 처녀와 모자는 한겨울 얼마간을 같이 산다.

처녀는 이 동네 저 동네 돌아다니며 온갖 바느질감을 다 받아오고 바깥일도 다 맡아한다.그러나 밤이면 눈천지를 휩쓸고 돌아다니는 몽유병자.떠날까봐 걱정인 어머니가 시켜 밤마다 소년은 처녀를 미행한다.설국의 하얀 밤,처녀는 바람에 흩어지는 민들레 꽃씨처럼 환상적으로 떠돌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한다.그러던 어느날 밤 소년은 마을 창고에서 처녀와 사내의 밀애장면을 눈앞이 아찔하게 목격한다.며칠후 처녀는 그 사내와 아무도 모르게 떠난다.말린 홍어가 걸려 있었던 문설주에는 처녀가 눈 속을 헤집고 캤을,파릇파릇한 씀바귀 한묶음이 걸려 있었다.어머니가 밤새 바느질하며 졸음을 쫓기 위해 뿌리를 질근질근 씹어대던 씀바귀.“또 눈이 오는구나.새도 하눌님이 지켜준 목숨이다.날려 보내그라.그 새는 성질이 급해서 니가 붙잡고 있으면,모이를 줘도 먹지도 않고 이틀이 못 가서 죽을 게다.날아다니는 짐승은 날아다니며 살도록 놔둬야제.그래야 지레 죽지 않고 지 신명껏 살다가 죽는 법이제.” 처마밑을 뒤져 잡아온 새를 보고 어머니가 내뱉은 말이다.신명껏 날아다녀야 하는 떠돌이의 삶.난데없이 왔다 뜬금없이 떠난 그 처녀는 깊은 바닷속을 날아다니는 홍어였고 남편이었으며 무엇보다 열네살 소년에게는 어렴풋이 여자와 세상에 눈뜨게 한'최초의 누님'이었다.세상 밖으로 날려 보내고픈 가오리연의 떠남의 미학.문설주에 매어두고픈 말린 홍어의 붙듦의 미학.이 상반된 미학이 비틀리며 짜내는 어머니 가슴앓이 같은 한(恨)스런 세계가 눈덮인 산촌에서 소년의 맑디맑은 눈에 찍힌 작품이'홍어'다.

눈에 가득 서정적 영상이 차오르게 하면서도 오묘한 삶의 뜻을 담은 이 작품을 발표하고 나서 金씨는 아이처럼 상기된 모습을 감추지 못한다.작가 자신의,혹은 소설의 고향인 중.단편 세계로 돌아와 문예미학에 대한 그동안의 한을 한껏 풀었다는 것이다.그러면서 金씨는 다시 아득한 대하의 세계로 신명껏 날아갈 채비를 갖추고 있다. 이경철 기자

<사진설명>

소설가 김주영씨가 45년전 맑은 소년시절의 마음을 되살려 눈덮인 산촌을 배경으로 오랜만에 문예성 짙은 중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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