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세서미 스트리트’와 흑인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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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오바마의 미국 대통령 취임을 지켜보며 미국의 수많은 흑인들은 한편으론 열광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조용히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 눈물은 과거 노예 시절의 한이 방울방울 맺혀 있는 눈물이다. 백인 여성의 유혹에 이끌려 침실에 들어간 흑인이 들키면 린치를 받아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었던 그런 한도 맺혀 있다. 그뿐인가. 반세기 전만 해도 버스나 화장실에 백인 자리와 흑인 자리가 나뉘어 있었던 데에 맺힌 한도 서려 있다. 미국에는 아직도 각종 인종 문제가 산적해 있지만, 오바마 당선과 취임은 미국이 위대한 통합의 나라임을 전 세계에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다.

미국에서 흑인 대통령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다양한 요인이 있다. 오바마의 대선 홍보 전략, 부시 행정부의 정책 실패, 경제위기 등이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무심코 지나친 더 중요한 요인이 있다. 바로 미국 공영 TV 방송국의 어린이 프로그램인 ‘세서미 스트리트(Sesame Street)’다. 이 어린이 프로에는 귀여운 인형들과 여러 인종의 아이가 뒤섞여 재미있게 노는 모습이 나온다. 내용이 워낙 재미있어 아이들 사이에선 대단한 인기다. 놀고 즐기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함 속엔 인종차별이 있을 수 없다. 프로를 즐기며 말을 배우는 시기에 아이들은 ‘자기와 다른’ 아이들에 대해 저항감 없이 그들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미국은 여러 가지 인종 통합 교육 정책을 폈다. 예컨대 학생들을 버스에 태워 흑인은 백인학교로, 백인은 흑인 학교로 보내 인종을 섞는 버싱(bussing)이라는 정책도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통합 교육 정책은 실패한 반면, 전국 어느 곳의 가정에든 친밀하게 파고든 어린이 프로그램 ‘세서미 스트리트’는 더 근본적이고 긍정적인 효과를 냈다. 유아기 때 받은 교육이 가장 깊이 뇌리에 각인된다는 이론을 굳이 꺼내 들지 않아도 흑인 등 타 인종에 대한 편견을 줄이는 데 어린이 프로가 기여했다는 연구 결과와 결국 이것이 오바마 기적의 원인(遠因)이라는 사실에 모두 쉽게 동의할 것이다.

우리나라도 이미 다문화 사회 시대에 접어들었다. 지난해 8월 현재 등록한 외국인 장기 체류자는 이미 100만 명을 넘어섰다. 아직은 아시아계가 주류지만, 남미와 유럽으로부터의 인구 유입도 빠르게 늘고 있다. 2007년에 결혼한 사람 9쌍 중 한 쌍이 국제결혼을 했다. 도시 지역 결혼의 7.3%가 국제결혼이고, 외국인 남성과의 결혼도 전체 결혼의 3%에 이른다. 그러니 이제 국제결혼이 농촌 총각의 일만은 아닌 것이 확실하다. 여기에 새터민과 등록하지 않은 불법 체류자를 포함하면, 대한민국이 다문화 사회임은 분명하다. 초·중·고교에 재학하고 있는 다문화 가정 학생들도 벌써 1만3000명에 이른다. 특히 저출산에 의한 노동력 감소와 세계화 추세로 외국인 유입은 가파르게 늘고 있다.

 이러한 추세에 대비해 학교 현장에서 다문화 교육이 이미 부분적으로 시행되고 있다지만, TV 등 미디어를 통한 어린이 교육도 절실하다. ‘미녀들의 수다’라는 인기 프로그램이 외국인 여성을 희화화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에게 그들의 다양한 시각과 삶의 희비를 전해주는 데 기여한 것은 확실하다. 마찬가지로 초등학교 입학 전의 아이들에게 인종적·문화적 ‘다름’에 대한 이해를 각인시켜 주면 저급한 민족주의를 벗어나는 사회 통합에 큰 효과를 낼 것이다.

타 인종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우리의 자화상에 얼룩져 있다. 유엔은 인종적·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고 모든 개인의 자유와 보편적 인권을 존중할 것을 선포했다. 그 같은 관용의 원칙이 이 땅의 다문화 사회 통합을 위한 기본 원리로 자리 잡아야 한다. 그 당위성이 오바마 취임에 담겨 있는, 우리를 향한 외침이다.

김용학 연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