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연설로 미국을 사로잡은 언어의 리더십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97호 20면

“남부연합의 제퍼슨 데이비스 대통령이 링컨처럼 생각하고 생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을 지녔다면 남북전쟁의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미 역사학회 회장을 지낸 제임스 맥퍼슨 프린스턴대 명예 석좌교수가 한 말이다. 한마디로 “링컨은 말과 글로 남북전쟁에서 이겼다”는 것이 맥퍼슨 교수의 결론이다.

불멸의 링컨

링컨은 비교 대상이 없는 뛰어난 연설가이자 문장가였다. 링컨의 뛰어난 글솜씨는 게티즈버그 연설에 얽힌 일화에서 드러난다. 링컨은 1863년 11월 19일 국립묘지 개관식을 위해 게티즈버그 전투의 현장을 찾았다. 링컨은 이날 연설에서 전쟁의 의의를 요약하며 ‘자유와 평등을 위해 건국된 미국의 단결’을 호소했다. 10문장, 272단어로 된 지극히 짤막한 연설이었다. 40여 편의 책을 저술한 사학자이자 언론인인 개리 윌스는 “게티즈버그 연설은 미국에서 모든 근대적 정치적 산문의 ‘조상’과 같다”고 평한 바 있다.

원래 개관식의 주요 연설자는 에드워드 에버렛이었다. 하버드대 총장, 하원의원, 상원의원, 매사추세츠 주지사, 국무장관을 역임한 에버렛은 당대 최고의 연설가였다. 그는 2시간 동안 연설했다. 찬조연설을 부탁받은 링컨은 2분간 연설했다. 연설이 끝나자 에버렛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직감했다. 에버렛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링컨에게 서신을 보냈다. “행사의 핵심적 의의를 전달하는데 대통령께서는 2분, 나는 2시간 걸렸습니다. 그나마 내용상으로는 내 연설이 대통령님의 연설에 근접했다는 데 스스로를 칭찬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에버렛은 하버드대를 졸업할 때 학생대표 축사를 한 수재였다. 학교를 18개월밖에 다니지 못한 링컨은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에버렛을 ‘꺾었고’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5만 명이나 사망한 데 따른 비판 여론을 잠재웠다.
링컨은 사람의 마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글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글쓰기는 눈을 거쳐 생각을 마음으로 전달하는 예술이며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이다.”

영화ㆍ라디오ㆍTVㆍ인터넷이 없던 링컨의 시대에 정치는 사람들에게 거의 유일한 낙이자 최고의 엔터테인먼트였다. 그만큼 군중 정치 집회에서 연설을 잘하는 게 정치인의 필수 조건이었다. 지나치게 큰 키에 외모도 볼품없었던 링컨은 목소리도 듣기에 거북한 쇳소리를 냈다.

링컨은 신체적 한계를 잘 짜인 연설의 수사와 콘텐트로 극복했다. 그 원천은 독서였다. 소설에는 취미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 링컨이 애독한 책으로는 성서, 이솝 우화, 천로역정,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 바이런의 시, 셰익스피어 희곡 등이 있다.
특히 성서와 셰익스피어는 링컨에게 생생한 이미지를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선사했다. 링컨은 독서를 통해 인간의 행동과 동기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얻었다. 사안의 모든 측면을 고찰해 판단하는 지혜도 선물 받았다.

링컨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글쓰기를 실천했다. 가능한 한 쉬운 단어를 사용했다. 1음절로 충분하면 굳이 2~3음절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게티즈버그 연설이 272단어에 불과한 것처럼 게티즈버그 연설과 쌍벽을 이루는 두 번째 대통령 취임사(1865) 또한 703단어였다.

독서는 링컨을 ‘두 얼굴’이 아니라 ‘여러 얼굴’의 정치가로 훈련했다. 그에게선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우유부단함과 결단력, 강경함과 온건함이 발견된다. ‘정직한 에이브(Honest Abe)’라는 애칭으로 불렸지만 링컨에게선 마키아벨리적인 면모도 발견된다. 청중에 따라, 상황의 변화에 따라 논리를 바꿨다. 남부를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하면서도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언론을 조작했으며 반대파 언론을 궤멸시키기 위해 공작도 진행했다.

독서로 단련된 링컨은 탁월한 이해력도 자랑했다. 군사문제에 문외한이었던 그는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놀라운 학습커브(learning curve)를 보이며 ‘타고난 전략가’로 거듭났다. 상대편인 제퍼슨 데이비스(1808~89) 남부연합 대통령은 웨스트포인트 출신으로 멕시코전쟁에 참전했으며 국무장관 직도 역임했다. 그러나 그는 링컨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링컨은 남북전쟁의 의미를 누구보다 앞서 이해했다. 그는 남북전쟁이 분리운동을 진압하는 제한전쟁(limited war)이 아니라 미국의 미래가 걸려 있으며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 하는 총력전쟁(total war)이라는 것을 이내 깨달았다. 노예제 철폐를 바라보는 자신의 미온적인 시각도 수정해 노예해방을 미합중국 일체성 유지의 수단으로 삼았다.

대문장가 링컨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그의 명연설은 노력의 산물이었다. 링컨은 1830~40년대에 200편 이상의 기사를 지역 신문에 익명 혹은 필명으로 기고했다. 일종의 습작 시대를 거친 셈이다. 당시 링컨은 연설을 거의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신문 기사들은 링컨의 사고와 문장력의 전개를 분석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사료다.

링컨은 성서나 셰익스피어 희곡뿐만 아니라 영어 문법책도 외우다시피 했다. “영어 학습에 문법은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에 생각거리를 던지는 사실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