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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노예 350만 놓고 남과 북 분열의 길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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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호 20면

링컨이 등장하는 1850년 미국의 역사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분열되어 있었다. 남부와 북동부·중서부·서부 지역의 경제·사회적 상황은 선을 그은 듯 각자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정치적 입장도 이를 반영했다. 단순한 정파 간 분열이 아니었다. 다른 생각을 가진 세력은 악으로 간주했다. 이 같은 분열은 남북전쟁으로 이어졌고 4년간 지속된 전쟁에서 62만여 명이 사망했다.

링컨의 시대

우선 정치적 면을 보자.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 때는 정당이 없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서로가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의 큰 목표, 즉 ‘독립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라를 세워 성장의 토대를 만드는 일’ 안에서 융화했다.
하지만 워싱턴 임기 말로 가면서 정치적 노선 차이가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토머스 제퍼슨을 중심으로 한 공화파와 알렉산더 해밀턴의 연방파 간 균열이 시작됐다. 전자는 남부 주(州)를 기반으로 주정부의 권한 강화를 주장하며 농업경제와 자유무역을 옹호했다.

반면 연방파는 연방 중심의 정치, 그리고 상공업 경제와 보호무역을 옹호했다.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제퍼슨이 존 애덤스를 누르고 승리함으로써 공화파가 세력을 장악했다. 공화파도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등장하면서 민주공화파와 국민공화파로 분열됐다. 민주공화파는 이전 공화파의 전통을 이어받아 민주당으로 발전했고, 국민공화파는 연방파 노선을 이어받아 휘그당을 거쳐 공화당으로 발전했다.

자유당과 자유토지당·노나싱당·아메리카당 등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기반과 입장을 달리하는 다양한 정당이 등장했지만 링컨이 대통령에 출마한 1860년에는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정리됐다. 민주당은 남부를, 공화당은 북동부를 각각의 지지 세력으로 한 채 점점 대립각을 세워 갔다.

문제는 더 복잡한 사회·경제적인 면에 있었다. 식민지 시대부터 남부는 담배·쌀·면화 등 농업경제로 성장해 왔다. 남부의 백인 농장주들은 넓디 넓은 농장을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흑인 노예 노동력으로 일궈 갔다. 유럽 중세의 장원을 연상케 했다. 때마침 시작된 유럽의 산업혁명은 남부의 면화 수요를 급속도로 증대시켰다. 농장주들에게 노예 노동력의 확보와 유지는 매우 중요했다.

반면 북동부는 네덜란드 모피 상인들의 활동을 출발로 상공업 경제가 발전했다. 기관차·철·총기류·직물 등을 생산해 냈다. 전체 북부 지역에 공장은 10만 개, 공장 노동자 수는 110만 명에 달했다. 철도가 3만2000여㎞(2만 마일)에 이르렀고, 은행 예금액은 남북 전체의 81%인 1억8900만 달러였다. 순금 보유액은 5600만 달러였다. 공장 수 2만 개, 공장 노동자 10만여 명, 철도 1만4400여㎞(9000 마일)인 남부 지역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매사추세츠주의 린에서는 신발 산업이 발달했다. 1850년 440만 켤레의 신발을 생산했다고 한다. 1870년 린시에 등록된 신발공장 수만도 158개였다.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의 기업가 매티아스 볼드윈은 1832년 첫 기관차를 생산한 이후 1500대의 기관차를 생산했다. 볼드윈은 흑인 노동자의 자녀를 위한 교육기금을 내기도 했다. 이에 항의해 남부 주가 볼드윈의 기관차 구매를 보이콧하는 현실이었다. 신생국인 미국의 상공업 발전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었고, 북부 지역 공장들은 자유로운 노동력이 절실했다.

이렇듯 흑인 노예 노동력은 남부와 북부의 운명을 좌우하는 뜨거운 감자였다. 1860년 미국 전체 인구 3140만 명 가운데 북부 인구는 2230만 명, 남부는 910만 명이었다. 남부 인구 중 350만 명이 흑인 노예였다. 남부는 노예주로, 북부는 자유주로 연방에 소속됐다.

미국을 분열시킨 좀 더 직접적인 원인이 있었다. 서부 개척으로 새롭게 성장하는 준주 혹은 주를 노예주나 자유주 가운데 어떤 주로 포함해 연방에 가입시킬지가 문제였다. 당시 서부 지역은 금광이 발견되면서 이른바 ‘골드 러시’가 이어졌다. 멕시코 원주민 1만3000명이 거주하던 캘리포니아는 1860년 인구 38만 명의 활기찬 지역으로 성장했다.

앞서 1820년의 ‘미주리 타협’을 비롯해 ‘1850년 타협’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은 모두 새로 성장한 주의 연방 가입을 놓고 갈등과 타협을 거듭한 끝에 나온 결과물이다. 연방은 1820년 미주리 협약을 통해 겨우 노예주 11개, 자유주 11개로 균형이 맞춰져 있었다. 만약 어떤 주가 연방에 더 많은 주 대표를 파견하게 되면 다른 주 대표들이 불이익과 차별을 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과 불신이 팽배했다.

흑인 노예의 인권 문제도 주요 이슈가 됐다. 노예제 폐지론자와 노예제 찬성론자가 복잡한 사회·경제적 문제와 뒤얽혀 서로의 입장을 고수했다. 여기에 남부와 북부 지역, 민주·공화 양당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고 결국 전쟁의 길로 끌고 간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드레드 스콧 판결’이었다. 스콧은 노예 신분이었다가 주인을 따라 자유주로 가 일단 자유인이 되었다.

그러나 주인이 다시 노예주로 왔는데, 그렇다면 스콧이 자유인인지 노예인지 하는 문제가 제기됐다. 연방대법원은 흑인 노예는 시민이 아니므로 소송을 제기할 자격이 없다고 판결했다. 판결에 따른 파장은 컸다. 폭동과 테러가 빈발했다. 해법은 나라를 쪼개는 길밖에 없다는 담론들이 노골적으로 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1860년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링컨은 “노예제도가 악이 아니면 무엇이 악입니까”라고 반문했다. 노예제도 자체는 분명히 없어져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링컨의 제1 목표는 노예제도 폐지가 아니라 연방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스스로 분리된 집은 하나로 설 수가 없습니다.” 링컨이 고수한 큰 틀이었다. 그것은 건국의 아버지들이 연방헌법에 천명한 것으로, 미국의 존재 이유인 동시에 링컨이 운명을 걸고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였다.

그래서 연방에서 분리해 나간 남부는 링컨과 그 지지자들에겐 적이 아니라 반역자였다. 남북전쟁은 전쟁이 아니라 반란의 진압이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노예 해방은 필수적이었고 이는 링컨의 또 다른 목표가 되었다.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고 난 후 링컨의 길은 분명했다. 그것은 조각난 나라를 다시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악의를 가지고 대하지 맙시다. 모든 사람을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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