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세계질서 만들 기회…美·中관계에 성패 달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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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호 04면

헨리 키신저(사진) 전 미국 국무장관이 버락 오바마 정부의 출범에 맞춰 새 정부의 국제질서 재편 전략에 대해 충고했다. 13일자 뉴욕 타임스와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 실린 기고문을 통해서다. 그는 1971년 중국을 비밀리에 방문해 미·중 수교의 기반을 다지고 미국의 세계전략을 짰다. 72년 중동평화 중재, 73년 베트남 평화협정 체결을 이끌어 낸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키신저의 기고문을 요약했다.

헨리 키신저, 오바마를 위한 조언

심각한 금융위기의 혼란 속에 새 정부가 들어선다. 지금 이 상황에서 불안정한 국제 정세가 창의적인 외교를 위한 특별한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여기서 기회란 외견상의 모순을 안고 있다. 이번 금융위기는 사람들이 미국의 패권에 혐오감을 느끼도록 했으며, 미국의 지위를 약화시켰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미국의 패권 아래 안온하게 생존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경제와 정치 사이의 갭은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정치 분야와 달리 경제 분야에서는 급속한 세계화가 진행돼 왔다. 경제기구들은 자율 규제가 가능하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이번 금융위기는 그런 생각이 신기루였다는 걸 드러냈다. 어떤 국제기구도 위기가 몰고 온 충격을 완화하거나 추세를 되돌릴 능력이 없었다. 각국 정부는 눈앞에 닥친 국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골몰하고 있어 세계질서에 대한 관심은 뒷전이다.

세계질서를 다시 세우려면 어느 나라가 중심 역할을 할 것인지를 명백히 해야 한다. 경제적 영향력을 겸비한 국제정치 시스템을 창조함으로써 정치와 경제를 통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역 단위의 중상주의가 나타나거나, 신(新)브레턴우즈 체제와 같은 국제조약이 등장할 수 있다.

이번 새 대통령의 취임은 새로운 세계질서를 구축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는 기회일 뿐이다. 구체적인 정책은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공동의 대응 전략이 수립돼야 한다. 이슬람 세력의 테러, 대량살상무기 확산, 에너지, 기후변화와 같은 이슈들은 개별 국가 차원이나 지역 단위의 문제 해결 방식으로는 대응할 수 없다.

새 정부가 집권 초반의 인기에 안주한다면 최악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 현재는 세계적으로 위기 극복을 위한 유례없는 협조 분위기가 조성돼 있다. 이를 이용해 ‘그랜드 전략(grand strategy)’을 만들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중국은 미국인의 빚을 떠안았고 미국인의 분에 넘치는 소비를 가능케 했다. 미국은 국내 시장을 개방함으로써 중국 경제의 현대화와 개혁·개방을 도왔다. 중국과 미국이라는 양대 수퍼파워가 적대관계를 형성한다면 그동안 가꾸어 온 모든 유산은 파괴되고 결국 모두에게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어떤 형태의 세계 경제질서가 만들어지느냐는 향후 몇 년간 미·중관계에 달려 있다. 중국이 절망적 상황에 놓인다면 배타적인 아시아 지역기구를 모색할 가능성이 있다. ‘아세안+3(한·중·일)’은 이런 씨앗을 안고 있다. ‘미국에서 보호무역주의가 창궐한다면…’ ‘중국이 장기적 관점에서 적대국이 된다면…’이라는 식의 얘기들은 자기 실현적 예언이 돼 국제질서의 전망을 황폐하게 만들 수 있다.

미·중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돼야 한다. 현재의 위기는 오직 공동 목표를 발전시킴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에너지, 환경 문제는 중국과 미국의 정치적 관계 강화를 요구한다. 환태평양 지역의 일원인 일본·한국·인도·인도네시아·호주·뉴질랜드와의 협력도 필수적이다. 국제질서란 참여자들이 질서의 구축 단계뿐 아니라 안정 단계까지 협력해야 영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미국과 잠재적 파트너들은 아주 특별한 기회를 갖게 됐다. 위기의 순간을 희망의 비전으로 바꾸어 낼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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