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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끄고 인문학 읽기’가 소통의 달인 만들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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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호 04면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인은 언제 어디서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 지난해 말 오바마가 시카고에서 친구 페니 프리츠커와 저녁식사를 한 뒤 나오고 있다. 그의 손에 링컨 전기가 들려 있다.

이틀 후면 역사적인 이벤트가 펼쳐진다.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흑인으로서 첫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버락 오바마가 제44대 대통령 선서를한다. 국민과의 공감에 성공한 오바마의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오바마의 공감능력은 ‘인문학 읽기’에서 길러졌다.

오바마 ‘국민공감’ 리더십의 비밀

워싱턴 포스트를 찾은 손님
15일 워싱턴 포스트 신문사 편집국에 손님이 찾아왔다. 대통령 당선인 버락 오바마였다. 도널드 그레이엄 워싱턴 포스트 회장과 함께 편집국을 찾은 그는 200명의 기자들과 일일이 악수했다. 그는 기자들에게 경제위기 극복 등 미국 정치 현안에 대해 설명했다.

지난해 4월 오바마가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켄터키 루이스빌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신문을 읽고 있다. 그는 촌각을 나눠 쓰는 유세 기간 중에도 매일 신문을 탐독했다. AP=본사특약

13일엔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의 데이비드 브룩, 조지 윌 같은 신문 칼럼니스트들을 만났다. 이들은 오바마에 대해 비판적으로 글을 쓰는 보수 언론인들이다. 숙명여대 언론정보학과 안민호 교수는 “오바마가 진보와 보수의 통합, 활자 신문의 영향력을 잘 인식한 대목”이라고 말했다.

오바마는 두 권의 책을 저술해 모두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자서전인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과 자신의 정치철학과 콘텐트를 담은 『담대한 희망』이다. 『담대한 희망』은 그래미상 ‘최고의 낭독 앨범’ 부문을 수상했다. 그의 책은 여느 정치인들과 달리 온전히 스스로 구상하고, 스스로 쓴 것이다. 문필가의 힘이자 인문학적 공력을 보여주는 성취물이다.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던 게리 하트 전 상원의원은 뉴욕 타임스에 “오바마는 번쩍이는 웅대한 문장력과 능력을 가진 현인”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위인전에서 영감과 통찰력 얻어
‘읽는 사람이 세상을 이끈다’는 격언이 있다. 미국 국립보건원의 연구에 따르면 “아이들이 TV를 많이 시청하면 건강이 나빠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바마는 수많은 연설에서 “TV를 끄고 비디오 게임을 치워라”(Turn off the television set and put the video games away)고 말한다.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 기조연설에서 그는 “도시빈민 부모도 아이를 잘 키워야 하고, TV를 끄게 하고 기대 수준을 높여주고, 책을 읽는 흑인이 백인 흉내를 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허위 선전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아이들에게 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오바마는 또 자주 “TV를 꺼버리고 자녀와 대화를 나눈다면 가족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바마는 전기나 역사책을 즐겨 읽는다. 대표적인 책이 링컨의 전기를 다룬 도리스 굿윈의 『라이벌의 팀』이다. 자신의 롤 모델인 링컨 전 대통령같이 오바마도 힐러리 등 라이벌을 등용했다.

시카고 트리뷴지는 “오바마는 미국을 빛낸 위인의 전기를 통해 통찰력과 영감을 얻었다”고 분석했다. 링컨, 루스벨트, 케네디, 마틴 루서 킹에 대한 책들을 섭렵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비전과 리더십을 만들어 갔다.

오바마가 바쁜 대선유세 중에도 책이나 신문을 들고 있는 장면은 언론에 자주 보도됐다. 그는 정치·역사·문학·사상·경영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섭렵하고 있다. 오바마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문학책으로 19세기 미국의 최고 작가로 손꼽히는 허먼 멜빌의 『모비 딕』과 199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토리 모리슨의 『솔로몬의 노래』를 꼽는다. 두 책 모두 자신의 정체성과 정치적 목표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한 흑인이 도전과 역경 속에서 겪는 좌절과 희망을 그린 『솔로몬의 노래』는 오바마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길잡이가 됐다고 한다. 19세기 미국 사회의 암적인 모순인 ‘인종차별’을 암시하는 식인 흰고래를 잡아나서는 인간의 도전과 모순을 그린 『모비 딕』은 오바마에게 탐험과 도전 정신을 줬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독서 습관
오바마가 책을 많이 읽고 성찰하는 습관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 문화인류학 박사인 어머니 스탠리 앤 던햄은 싱글 맘으로 오바마를 키우며 교육에 올인했다. 오바마에게 영어를 가르치려고 새벽 4시에 깨웠고, 민권 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연설을 들려주었다.

그녀의 손에 항상 책이 있었고, 자녀들에게도 책을 많이 읽을 것을 권유했다. 어머니는 아들 자서전 『내 아버지로부터 꿈』 초고를 읽고 감수까지 해주었다.

외할머니 메들린 페인은 오바마에게 두 번째 어머니였다. 딸이 인도네시아로 떠나자 열 살인 외손자 오바마를 맡아 중·고등학교까지 돌본다. 오바마가 지난 14일 두 딸 말리아와 샤사에게 보낸 편지에 “아빠가 어렸을 때 외할머니께서는 독립선언문을 읽어주셨고, 평등을 위해 행진하던 사람들에 대해 얘기해 주셨다”고 말했다. 두 여성은 오바마에게 멘토였고, 읽기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오바마는 LA 옥시덴털대를 거쳐 컬럼비아대로 옮긴 후부터 본격적으로 공부에 흥미를 느껴 ‘수도승처럼’ 공부했다. 그는 자신의 방에 책을 산더미같이 쌓아놓고 읽었다. 정체성에 대한 방황 때문에 한때 손댔던 마약도 끊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오바마는 아르헨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보르헤스(Borges)와 코르타사르(Cortazar)의 소설을 대학생 때 열심히 읽었다”고 말했다. 두 명은 20세기 세계 문학사에 남을 아르헨티나 작가다. 많은 언론은 “두 소설가를 아는 미국 대통령은 드물다”고 말했다. 오바마는 대학 시절 책벌레였다.

오바마가 미국 최고의 명문대인 하버드 로스쿨의 ‘하버드 로 리뷰’의 첫 흑인 편집장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지적 내공이 있었기 때문. 그는 인터뷰에서 “정치인이 되지 않았다면 문학가의 길을 갔을 것”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그만큼 지적·문학적 능력이 높았다.

일찍 퇴근해 공부하는 이상한 정치인
존 케리 등 오바마의 상원의원 동료들은 “여러 로비스트와 저녁에 다른 일정을 잡을 수 있는데도 오바마는 일찍 퇴근해 집에서 책을 읽고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고 말한다. 기존 정치인 기준에서 보면 이상한 정치인이 아닐 수 없다. 뉴욕 타임스는 “그는 항상 성찰의 시간을 갖고, 일기를 쓰며 깊은 사색에 잠긴다”고 보도했다. 하버드대 정치학과 조셉 나이 교수는 “책과 신문을 통해 오바마는 스마트 리더십을 키워갔다”고 평가했다.

2004년 11월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된 그는 미국 현실 문제에 대해 공부해 수많은 입법을 제안했다. 국방과 외교, 교육, 경제, 에너지, 건강, 인권, 사회적 약자 등이 중심 주제였다. 이를 통해 그는 미국 미래 지도자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는 전국신문출판협회와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 등 영향력 있는 단체로부터 지도자상을 받았다.

공감 커뮤니케이션
작가적 글쓰기 능력을 인정받고 연설의 연금술사라는 별명을 가진 오바마의 힘은 읽기에서 나왔다. 그는 또 미국 위인들의 국민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배웠다. 링컨에게선 통합을, 루스벨트로부터 위기 극복을, 케네디에게선 변화를, 킹으로부터 차별 없는 희망을 배웠다. ‘담대한 희망’ ‘우리의 변화’ ‘하나의 미국’이라는 시대정신을 만들어 국민과 소통해 대통령 직에 올랐다.

그가 국민과의 커뮤니케이션 달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최고의 경청자’라는 특별한 자질이 있었기 때문. 대선 승리의 일등 공신으로 백악관 선임고문인 데이비드 액설로드는 미국 ABC방송에 출연해 “오바마는 강력한 의견을 요청하는 사람이며, 이는 오바마 리더십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오바마가 대통령 당선 연설에서 표현한 이 한 문구가 세계인의 공감을 얻었다. “I will listen to you!” (나는 당신의 의견을 듣겠습니다!) 오바마는 많이 읽고 깊이 사색하며, 누구에게나 듣고, 맛있게 표현하고 멋있게 말한다. 그는 당대 최고의 커뮤니케이터며 인문학의 챔피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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