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딜에 대한 오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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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호 30면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대중연설 화법은 로마의 웅변가 키케로와 그리스의 데모스테네스를 능가했다고 한다. 키케로의 연설이 끝나면 ‘어쩌면 말을 저렇게도 잘 하나’ 하는 감탄이 쏟아진 반면 데모스테네스의 연설이 끝나면 ‘당장 필립스를 쳐부수러 가자’고 사람들이 일어설 정도였다고 플루타크 영웅전은 전한다.

루스벨트는 대공황으로 도탄에 빠진 미국을 살려 낼 구조자(rescuer)로서 자신을 이미지 메이킹하는 데 키케로적 웅변을 구사했고, 뉴딜의 정책 목적을 설득시켜 국민을 이끌어가는 데 데모스테네스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쉽고 간단하고 물 흐르듯 하는 표현으로 말과 이미지 양면에서 국민에게 직접 다가가는 능력이 탁월했던 데서 얻어진 평가다.

1932년 11월 대통령에 당선돼 수락 연설에 국민의 귀가 쏠려있을 때 그는 쉬우면서도 국민에게 마력을 불어넣어 줄 구호를 찾느라 골몰했다. 전통과의 단절, 어리석은 관행타파를 상징하는 두 단어가 바로 뉴딜(New Deal)이었다. 새로운 사회협약이란 의미다. 누구나 알기 쉽고, 리듬이 있고, 뭔가를 기약해 주는 상징어로 대성공이었다.

뉴딜은 제도를 바꾸고, 시스템을 정착시키고, 효율을 살리는 정치·경제·사회적 대개혁 프로그램이었다. 실업자 구제와 일자리 창출, 경기 부양은 뉴딜 프로그램의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스탠퍼드대의 경제사학자 가빈 라이트는 뉴딜정책을 많은 사람이 대공황 대책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뉴딜의 핵심은 사회적 불평등을 줄이고, 금융시스템을 현대화하고, 노사 단체협약을 제도화하고, 최저임금제를 도입하고, 인간자본과 고등교육에 대한 대규모 투자 등 새로운 사회계약을 위한 국민적 합의 도출이었다.

대공황 극복에 대한 뉴딜의 기여를 놓고 지금도 경제학자들 간에 찬반이 팽팽하다. 미국의 실업률은 1930년에 8.7%였다. 32년에 24%로 치솟았고 33년부터 40년까지 연평균 실업률은 17%였다. 1940년에 15%로 내려가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준비가 시작되면서 실업률은 진정됐다. 대공황을 이겨 낸 것은 뉴딜이 아니라 2차대전 특수였다는 얘기도 된다.

특히 재정 지출을 통한 경기 부양은 케인스 처방과는 거리가 멀었다. 토목사업국(CWA)을 창설해 도로·교량·항만·공항·학교 등의 건설 및 보수로 400만 실업자를 구제했지만 낭비적 요소가 많았다. 항구적 선례를 남길 것을 우려해 1934년 봄엔 CWA를 해체했다.

케인스가 루스벨트에게 이따금 편지를 보내 신속하고 과감한 재정 투입을 촉구했으나 재정을 통한 부양책에 나선 것은 1938년이었다. 그것도 재정적자 최소화에 집착했고, 성과가 날 정도의 과감한 지출은 전쟁을 준비하면서부터였다.

대공황이라는 초비상 상황에서 가시적인 토목구제사업이 주목을 끄는 것은 당연하지만 민간 부문 투자에 비해 효율이 떨어지고 지속적이지도 못하다는 것이 역사적 경험법칙이다. 미국의 오바마 차기 대통령은 루스벨트보다 더 야심적인 경기 부양 보따리를 준비 중이다. 미국 전역 641개 도시는 1만5000개 프로젝트에 2년간 970억 달러를 들여 200만 일자리를 창출하는 건설공사계획을 마련해 ‘삽질 준비’를 갖추고 있다. 멀쩡한 시청청사와 컨벤션센터 개축, 도로 추가 확장 등 불요불급하고 예산 낭비적 요소가 많아 벌써부터 논란이 그치지 않는다.

국제통화기금(IMF)이 각국에 국내총생산(GDP)의 2% 재정지출사업을 촉구하고, 경기촉진책이 국제공조를 이루면서 ‘케인스주의’가 화려하게 부활 중이다. 그러나 이들 경기부양책을 ‘뉴딜’로 포장하기에는 뉴딜의 함의가 너무 넓고 크다.

뉴딜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한 정치·경제·사회적 개혁의 총체였다.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워 대공황에서 미국 자본주의를 구해내고 유럽의 파시즘과 공산주의로부터 미국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그 원동력은 설득의 리더십, 굳이 부양책으로 표현한다면 ‘부양의 정치’(stimulus of politics)다. 루스벨트는 앞니 두 개에 틈새가 벌어져 어떤 단어를 발음할 때 쇳소리 같은 것이 났었다. 국민을 향한 라디오연설 때 틈새에 의치(義齒)를 낄 정도로 국민과의 소통을 소중히 했다. 오늘의 세계불황에서 뉴딜의 의미는 곧 ‘불황의 리더십’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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