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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월간 지구 한 바퀴, 극한을 정복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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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호 16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오스트레일리아’라는 부제를 달아도 좋을 만큼 터프한 영화, ‘오스트레일리아’를 관통하는 오브제는 럼이다. 미국 서부개척시대 카우보이들에게 사랑받았으며, 지금도 카리브해 서인도제도 바하마의 선원들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는 럼, 글라스에서 목젖으로 넘어가는 순간 ‘크악’ 소리가 나는 독주다. 9개월 동안 대서양·인도양·태평양을 돌아 3만7000해리를 헤쳐나가는 볼보 오션 레이스(이하 VOR) 또한 쓰디쓴 럼주를 입 안에 머금고 견뎌야 하는 극한의 스포츠 이벤트다.

‘대양을 달리는 F1’ 볼보 오션 레이스

“VOR은 샴페인이나 진보다는 거친 럼에 비교할 수 있다. 아메리카스컵이 지나치게 성과 중심인 반면, VOR은 예측 불가능한 대양을 모험하는 세일링의 로큰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대회부터 VOR에 참가하고 있는 푸마 요헨 하이츠 회장의 말이다.
무엇보다 이번 2008~2009 VOR은 아시아 요트 세일러와 관계자들에게는 의미 있는 대회다. 73년 이 대회가 열린 이래 아시아에서 최초로 인도의 코친과 싱가포르, 칭다오(靑島)를 경유하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해 크리스마스 직전에 싱가포르 센토사 섬에 들어온 7개 팀은 얼마간의 휴식을 취한 뒤, 지난 12일 센토사 섬에서 VOR 인포트 레이스(In Port Race)를 했다. 이어 18일 각 팀은 네 번째 경유지인 칭다오를 향해 세일을 올렸다.

일단, 아메리카스컵과 비교해 볼보 오션 레이스를 짧게 소개한다. 위상은 아메리카스컵이 한 수 위다. 그러나 VOR 또한 세계 3대 요트 레이스로 손꼽힌다. 대회는 2년에 한 번씩 열리며 73년 ‘The Whitbread Round the World Yacht Race’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으나 2001년부터 볼보가 후원하면서 ‘볼보 오션 레이스’로 불리고 있다. 아메리카스컵과 다른 점은 경기 방식이다. VOR은 각 거점 항구를 항해하는 레그(구간 레이스)와 각 항에 도착했을 때 근해에서 벌이는 인포트 레이스로 구성된다. F1 그랑프리처럼 10번의 레그와 7번의 인포트 레이스 점수를 합산해 챔피언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10개 팀 중에서 선발된 도전자가 전 대회 챔피언과 한 장소에서 일대일 매치 방식으로 대결하는 아메리카스컵과는 경기방식이 많이 다르다. 이번 대회는 지난해 10월 11일 스페인 알리칸테항을 출발해 오는 7월 4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집결하는 것으로 루트가 잡혀 있다. 아메리카스컵에 출전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세일러들과 12명의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이 참가하고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한번도 아시아에 들르지 않다가 이번에 갑자가 인도, 싱가포르, 중국 3개국을 경유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요인은 스포츠 이벤트와 연계된 경제적 효과 때문이다. 대회 메인 스폰서인 볼보를 포함해 스웨덴 기업 에릭슨 등이 중국과 인도 기착을 요구했다는 후문이다.

“우리는 아시아에서 두 가지 가능성을 보고 있다. 첫째는 인도와 중국 동북아 기업들의 스폰서십 창출이며, 또한 아시아에서 점진적으로 세일링 인구가 늘고 있다는 점을 주시하고 있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경우 상당한 수준의 요트 인구가 자리 잡고 있으며, 지난해 올림픽 경기를 개최한 칭다오 또한 매력적인 요트 도시다.” VOR 사무국의 CEO 너트 프로스타드의 말처럼 중국은 2007년 아메리카스컵에 참가한 데 이어, 이번에도 그린 드래건이라는 팀을 출전시키며 동북아의 요트 거점 도시로 부상하고 있다. 또한 이번 대회가 열린 싱가포르의 멤버십 요트클럽 ‘One degree 15 Marina Club’ 역시 럭셔리 요트 마리나로 위상을 높였다. 너트 회장은 이 마리나를 “우리가 지나는 스톱오버 마리나 중에서 보석과 같은 존재”라고 치켜세웠다. 이와 관련, 국제요트대회 프로모터 김동영(세일뉴질랜드인터내셔널) 대표는 “요트는 이제 단순한 스포츠 경기가 아니다. 스폰서십, 요트 메이커 등 관련 산업뿐만 아니라 도시 자체의 이미지를 바꿀 수 있는 거대한 비즈니스 이벤트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고 말했다.

대회가 시작된 지 100일 남짓. 지난주까지 세 번의 레그와 두 번의 인포트 레이스가 열렸으며, 스웨덴팀 에릭슨4가 39.5포인트로 선두를 달리고 있다. 그 뒤를 스페인팀 텔레포니카 블루, 미국팀 푸마 오션레이싱팀이 쫓고 있다.

12일 싱가포르 이스트코스트 파크웨이 해안에서 펼쳐진 인포트 레이스에서 에릭슨4가 우승을 차지해 승점 4포인트를 더했다. 반면 푸마팀에는 아쉬운 경기였다. 총 두 번의 플라이트 중 푸마팀은 첫 번째 게임에서 1위로 결승점을 통과했지만, 두 번째 경기 도중 갑작스럽게 킬(배의 균형을 잡아주기 위해 배 밑바닥에 설치한 부재)에 문제가 생기면서 4팀의 요트가 순식간에 푸마팀을 앞질러 가는 순간을 지켜봐야만 했다. 이보다 앞서 지난해 크리스마스 직전에는 VOR의 매력을 그대로 보여주는 극적인 순간이 연출됐다. 아프리카 케이프타운을 출발한 세 번째 레그 레이스에서 텔레포니카 블루팀이 결승점을 불과 6~7마일을 남겨놓고 앞선 팀들을 따돌린 것이다.

“우리는 초반 선두로 달리다가 도중에 빼앗겼고, 그래서 막판 역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극적이었다. 마지막 6~7마일을 남겨놓고 갑자기 바람이 죽어버렸고, 그래서 다른 팀들과 거리가 좁혀졌다. 그 순간 우리는 바람을 안았고, 집(결승점)까지 무사히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텔레포니카 블루의 스키퍼 보위 베킹의 소감이다.

아시아 3국을 들르는 신루트는 여태까지 VOR에서 보기 드문 익스트림 레그 레이스를 예고하고 있다. 바로 2월 14일 칭다오를 출발해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까지의 1만2300해리를 건너는 장거리 레그가 그것이다. 이처럼 오랜 항해 동안 세일러들이 겪는 고충과 인내는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가 많다. 70피트 요트에서 10여 명의 선원이 바다와 맞서야 하는 상황은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을 동시에 맞아야 한다는 뜻이다.

넉넉한 식량도 마른 옷도, 그리고 포근한 잠자리도 충분히 누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한 레그를 거치면, 몸무게가 10㎏나 줄어드는 선수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VOR은 곧잘 에베레스트 등반에 비유되기도 한다. 일정 내내 고통과 인내심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팀원들끼리의 융화 못지않게 각 팀 간의 유대와 협력도 중요하다. 사고가 날 경우 “우리 팀이 의지할 수 있는 곳은 다른 팀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선수들은 말한다. 실제로 2005~2006 대회에서 동시에 2개의 태풍을 만난 한 팀의 멤버가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섭씨 50도의 태양 아래 40노트의 속력으로 15m의 파도를 뚫고 보트의 균형을 유지하며 항해를 지속하는 것은 정말 익스트림이다. 그것은 극한의 양끝을 경험하는 것이다. 항해 직전에 날씨정보를 받고 대비하는 것도 고충이 따른다. 먹는 것 또한 힘들다. 레이스에서는 무게를 줄이기 위해 모든 음식을 말린 것으로 준비한다. 그래서 오션을 항해할 때, 스테이크를 자르는 상상을 가장 많이 한다.”

아메리카스컵에 두 번이나 출전했던 푸마팀의 스키퍼 켄 리드의 말이다. 세일러들은 어쩔 수 없이 9개월 동안 지구를 한 바퀴 돌아야 하기 때문에 이산가족이 될 수밖에 없는데, 결혼한 선수들의 아내와 아이들 또한 요트가 경유하는 도시를 쫓아 세계일주를 함께하기도 한다.

이런 레이스 상황에서도 비교적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영양학적으로 계산된 식사와 잘 훈련된 의료담당 선원, 그리고 첨단 과학이 접목된 선원 복장과 장비들 덕분이다. 모터스포츠와 함께 요트 이벤트 또한 전문적인 장비와 의류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이를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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