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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가난이 내 음악의 힘 됐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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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7일 오후 경기 고양아람누리 음악당. 미국 예일대 지휘과의 함신익 교수가 연주회를 앞두고 있었다. 그는 예일 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기도 하다. 흰색 보타이(나비 넥타이)와 조끼, 부푼 고수머리와 선 굵은 얼굴은 베토벤을 연상케 했다.

달동네 출신인 함신익 예일대 교수와 ‘가난한 음악 소년’ 은엽이가 만났다. 7일 고양아람누리 음악당 분장실에서 함 교수가 은엽이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다. 함 교수는 “가난과 결핍이 내 에너지가 됐다”고 말했다. [안성식 기자]


그가 대기하고 있던 분장실에 중학생으로 보이는 소년 한 명이 찾아왔다. 함 교수는 그를 피아노로 이끌었다. 소년은 쇼팽과 베토벤을 연주했다. 함 교수는 눈을 감고 듣다 박수를 쳤다. 그는 “분장실의 피아노 상태가 안 좋은데, 다루는 실력이 뛰어나다”고 칭찬했다.

공연을 위해 고국을 찾은 함 교수는 지난해 연말 지인으로부터 김은엽(16)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데도 피아노를 접고 싶지 않다는 김군의 말을 전해 듣고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가난과 결핍을 에너지로 삼았다”는 그가 가난한 은엽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함 교수의 고향은 지금은 사라진 서울 삼양동의 달동네다.

은엽이의 어머니는 빌딩 청소를, 아버지는 일용직으로 건설현장에서 일을 한다. 부부는 어릴 적부터 은엽이를 어린이집에 맡겼다. 은엽이가 다섯 살이던 어느 날 부모는 어깨 너머로 배운 실력으로 멋진 곡을 연주하는 아들을 발견했다. 그러나 은엽이는 열 살이 돼서야 자기 피아노를 가졌다. 남이 버리려던 피아노를 어머니가 얻어 왔다. 눌러도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 건반이 여럿 있었다. 부모는 한 달에 5만~10만원 정도 하는 동네 피아노 학원에 은엽이를 보냈다. 학원 강사는 “재능이 있으니, 좋은 곳을 알아 보라”고 했다. 그러나 형편이 어려워져 최근엔 학원마저 끊었다.

그러던 은엽이에게 기회가 왔다. 지난해 서울시에서 마련한 ‘저소득층을 위한 음악 영재 교육 프로그램’에 뽑혀 6개월간 교육을 받았다. 곧바로 은엽이는 피아노 콩쿠르에 입상했다. 서울의 한 예고에도 합격했다. 어머니는 “눈물이 날 정도로 놀랐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입학금 170만원을 마련하지 못했다.

베네수엘라에는 저소득층을 위한 예술교육 지원 제도 ‘엘시스테마’가 1975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27세에 LA필하모닉 차기 상임지휘자로 지명된 구스타보 두다멜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최연소 더블베이스 연주자 에딕슨 루이스(23)는 엘시스테마 출신이다. 그러나 국내엔 이 같은 지속적인 지원 시스템이 없다. 발을 동동 구르던 즈음에 함 교수의 연락이 왔다.

함 교수는 은엽이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그는 아버지가 목사로 있던 달동네 작은 교회에서 자랐다. 성가대 반주를 하며 피아노를 배웠고, 장학금을 받아 음대에 진학했다. 200달러를 들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식당 웨이터에서 무허가 지압사, 냉동트럭 기사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

그는 “가난이 나를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고 은엽이를 보며 말했다. “예일대·줄리아드 음대도 실력만 있으면 장학금을 받고 들어갈 수 있다. 돈이 없어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를 통해 받아들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공연을 위해 분장실을 떠나며 함 교수는 은엽이에게 “너의 음악을 들은 누군가가 그것을 흥얼거리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피아노를 칠 때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행복하다는, 그래서 피아노를 놓은 뒤에 찾아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더 두려웠다는 은엽이였다.

그러나 함 교수의 공연을 모두 지켜본 은엽이는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힘주어 말했다. 은엽이는 함 교수의 사인이 담긴 자서전을 선물로 받았다. 책에는 ‘with best wishes(희망을 빌며)’라고 적혀 있었다.

정선언 기자 ,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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