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한국대학총장협회 조완규 이사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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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정치권에 당부합니다.국가영도력은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것이며,국민의 신뢰는 바로 진실에서 생기는 것입니다.(중략) 여야 정치인은 국민 앞에 다짐한 바와 같이 정파를 초월하고 정쟁을 지양하여 국리민복과 나라경제 살리기와 국가안보에 초당적 협력을 실천할 것을 강력히 촉구합니다.”지난 12일 우리사회의 지성과 경륜을 대표하는 전국 대학총장들이 현시국의 어려움을 보다 못해 침묵을 깨고 국민 앞에 나섰다.전국에서 모인 총장들은 국민에게 드리는 호소문을 발표하고 현재의 난국을 헤쳐 가는데 온 국민의 힘을 모으자고 외쳤다.전.현직 대학총장들의 모임인 한국대학총장협회가 이같이 국민 앞에 나서기까지에는 내부적으로 적지 않은 찬반논쟁이 있었다.이런 식의 집단 의사표현을 해본 적이 없는 모임이었기에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다.그러나 도저히 침묵할 수만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조완규(趙完圭.전서울대총장)협회이사장을 만나 대학총장들이 나설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현국면의 진단,나름대로의 처방등에 대해 들었다.생명공학의 연구성과를 산업기술로 전환하기 위한 단체인 생물산업협회의 회장이기도 한 그는 전경련회관 17층 협회사무실 한편에 마련된 작은 방에서 뭔가 열심히 쓰고 있다가 기자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대학총장협회라는 모임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됐습니까.“94년 전.현직 대학총장들과 교육부장관들이 모여 만들었습니다.우리 사회에서 막중한 책무를 지고 있는 지성으로서 나라의 앞길을 함께 걱정하고,올바른 여론을 만들어 가자는 취지에서 이런 모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만들었습니다.전국적으로 3백여명이 참가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이렇게 대국민 호소문을 내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몇달 전부터'나라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고 우려하는 회원들이 많았습니다.평소처럼 회지 형식의 책(대학지성)을 통해 의견만 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지적도 많았죠.'우리가 이럴 때 한마디 하려고 만든 모임인데 그냥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해 목소리를 내기로 했어요. 처음에는'시국선언문'이라고 이름을 붙이려다'우리 스스로도 반성할 면이 많은데 무슨 선언이냐,국민 앞에 호소하는 형식으로 하자'는 주장이 많아 호소문을 냈죠.개인적으로,그간 이런 시국에 사심 없는 목소리를 내는 단체나 기구들이 없어 답답했어요.”

-김준엽(金俊燁)전고려대총장같은 분은 85년 총장직사퇴 이후 한번도

공개석상에서 강연을 안한 분인데 이번에는 나왔더군요.“우리가

나서야한다는데 대해 회원들의 반응이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金전총장도

이런 시국에 나서야한다고 권하자 흔쾌히 나서더군요.그만큼 요즘 우리

사회의 심각한 양상을 다들 깊이 공감했다는 것이겠죠.” -정치권에 대한

당부말씀에서'대통령이 결단을 내려야 한다''여야가 정파를 초월해 협력해야

한다''정경유착의 부패고리를 끊어야 한다'는등의 주장을 했는데,이를 두고

여당과 야당이 서로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더군요.“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우리가 어떤 정치적 이해를 가지고 얘기한 것은 아니니까

모두들'원로들의 충정'으로 순수하게 받아들여 주었으면 좋겠습니다.국정의

책임이야 1차적으로 여당에 있지만 야당의 책임도 적지 않죠.여든 야든 같은

배를 탄 오월동주(吳越同舟)아닙니까. 아무리 대통령선거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나라가 있고나서야 대통령도 있는 것이죠.다같이 나라를 먼저

바로잡아야 합니다.” -구체적으로'대통령의 결단'은 어떤 의미인가요.야당이

주장하는'거국내각'이나 일부에서 주장하는'하야'를 의미하지는

않나요.“구체적인 정치쟁점에 대해서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죠.다만

헌정중단까지 가서는 안된다는 데는 뜻을 같이했습니다.결단이란 것도

통치권자로서 잘못한 것은 시인하고 국민앞에 다시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국민 사과를 하는 것은 통치권자로서의 용기입니다.절대 필요한

용기죠.그런 용기를 가지고 이번 사태를 일단락짓고 남은 임기동안

국정수행을 제대로 해나가는게 통치권자의 책무라고 생각합니다.그러고도

미흡한 문제가 있다면 국정을 무사히 수행하고 퇴임한 뒤에 다시 국민의

심판을 기다리면 됩니다.”

-이런 위기를 초래한 한보사태나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민주주의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미국같은

나라도 민주주의를 얻는데 2백년 이상 걸렸잖아요.우리가 언제 쉽게 살아온

민족입니까.간단없는 어려움 속에서도 이만큼 왔습니다.

처음으로 문민정부를 맞아 우리의 기대가 너무 컸다고

생각합니다.문민정부가 됐다고 민주주의가 다 이뤄질 것처럼

생각했죠.하지만 그게 그냥 되는게 아니잖아요.우리는 한창 민주주의로 가는

길 한가운데 서 있습니다.이번 사건은 그 과정에서 거쳐야할 시련의

하나입니다.어쨌든 시간이 필요합니다.” -따지고 들어가자면 대통령이 지난

대선자금까지 전부 밝혀야 하고,그렇게 되면 하야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지지 않을까요.“글쎄요.우리가 생각하는 결단은 대통령의

정직성입니다.金대통령의 리더십은 과거 정권처럼 무력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문민대통령으로서의 도덕성과 정직성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그를

대통령으로 뽑은 것도 그런 그의 장점 때문이겠죠.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사죄한다면 그를 뽑아준 국민은'그 시대에 그럴 수 있었다'고 납득하리라

봅니다.어차피 대통령도 우리중 한 사람이고,모든 국민은 또 대통령과 같이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니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야당도 마찬가지입니다.이 시점에서 누가 덜 더럽느냐고 따지는 것은

무의미합니다.다같이 국민 앞에 참회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겁니다.”

-이번 일을 민주화 과정의 시련으로 비유하셨는데 정말로 현정권이

민주화라는 방향으로 걸어왔다고 보십니까.“국민적 기대수준에는

못미쳤다고 하더라고 그 사이 우리나라가 많이 민주화된 것은 사실

아닙니까.이번 우리 모임도 과거에는 정보기관 같은 곳에서

'뭐하느냐.호소문을 미리 보여달라.그런 일은 안하는게 좋겠다'는등 사사건건

개입하려 했겠죠. 그러나 이번에는 일절 그런 일이 없었어요.작지만 큰

변화입니다.민주화 과정의 절반은 왔다고 생각합니다.이번 사태는 이쯤에서

적절히 터졌다고 봐요.어떤 면에서 민주사회로 성큼 다가갈 수 있는 역전의

기회라고 할 수 있겠죠.”

-金대통령을 과거 전임대통령과 비교.평가할 수 있을까요.“수평적으로

비교하기는 힘들죠.요즘 중앙일보에서 박정희(朴正熙)대통령에 대한

시리즈를 싣더군요.비서실장했던 분이 쓴 회고록이니까 좋은 얘기가

많겠지만,요즘 분위기와 맞는 면이 있어요.과거에 독재자라고 욕을 먹었던

분인데 요즘은 그에 대해 좋게 말하는 사람이 많아졌죠.'역사의 평가'라는

말을 생각케 하더군요. 사후 20년이 지나면서 과거의 부정적인 면보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경제성장을 일구었다는 공적이 더 높이 평가되는 것

아니겠습니까.다른 대통령들도 다 마찬가지겠죠.金대통령도 후세에

문민대통령으로서 민주화를 이룬 공을 인정받으리라 봅니다.” -金대통령이

역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기 위해 현시점에서 해야할 일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가장 시급한 일은 코앞에 닥친 대통령선거를 깨끗하게 치르는

일이겠죠.빨리 돈안드는 선거로 제도를 개혁하고,이를 엄정히 집행해야

합니다.대선후보들의 이해가 걸려 쉽지않겠지만 그래도 악순환을 막기 위해

반드시 해야합니다.

대통령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도록 국민들은 힘을 실어주어야 합니다.우리

현실에서 대통령외에 이런 일을 대신할 사람이나 세력이 없습니다.” -요즘

용(龍)들이 너무 많은 것 같지 않습니까.“예비후보야 많을수록

좋지요.그만큼 인재가 많다는 얘기 아닙니까.” -용들에게 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제발 출사표 좀 제대로 내놓아 주었으면 합니다.왜

출마하는지,다른 후보와 어떻게 다른지,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든지 등등.그저

막연하게'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겠다'가 아니라 일반 국민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도록 구체적인 구상과 비전을 제시해주어야죠. 그렇게

정도(正道)로 나가야지 남의 말꼬리나 잡고 세몰이나 하는 식으로는 큰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좀 다른 얘기입니다만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교수들의 정치참여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교수들의 본분은 연구와

강의입니다.그들이 분야별로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기에 대외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시하고 지식을 빌려주는 것은 바람직하죠.그러나 현실속에

뛰어든다는 것은 문제가 다릅니다.

쉽게 말해 각 대선주자가 교수들에게 전문적 지식과 의견을 구하는 것은

좋지만 나중에 당선됐다고 그들을 장관으로 임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교수는 자기의 전공분야는 잘 알지만 현실을 두루 잘 알지는

못하니까 시행착오가 많아요.”

-교육부장관을 지낸 분이 그렇게 얘기하시면 모순이 있는 것

아닙니까.“허허….안그래도 92년 당시 정해창(丁海昌)대통령비서실장이

장관을 맡아달라고 전화해 한 20분간'못한다'며 승강이를 벌였었죠.그러자

丁실장이'이미 대통령이 결심했고,1시간뒤에 발표할테니 그렇게 알라'고

전화를 끊더군요.그렇게 장관이 되었습니다.” -서울대총장(87~91년)이나

장관시절과 비교해 요즘은 대학이 조용한 편이죠.“한보같은 일이 2~3년전에

터졌다면 광화문바닥이 학생들로 꽉 찼을 겁니다.요즘은 정말

차분해졌어요.하지만 대학으로서 건전한 사회비판 기능을 잃어서는

안됩니다.폭력시위도 곤란하지만 사회현실에 무관심해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죠.냉철한 지성을 가지고 연구하고,토론하고,또 대학신문등에 그

결과를 발표하거나 축제마당에서 풍자극을 벌이는등의 비판정신은

살아있어야 합니다.” -이번 사태로 정말 우려되는 것은 경제위기라는 지적이

많습니다.생명공학을 전공해온 학자로서 평소 생각해오신 것은

없습니까.“해방후 50년 역사속에서 우리가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한 해는 꼭

네번입니다.86년부터 89년 사이죠.당시 흑자가 가능했던 것은 외부적 여건이

좋아서입니다.소위 3저(低)호황에다 당시만 해도 외국기술을 얻어오기가

쉬웠어요.그때 번 돈을 다 어떻게 했습니까.외국여행이니 하면서 다

써버렸잖아요. 그런 사이 우루과이라운드니 세계무역기구(WTO)니 하면서

개방이 불가피해지고 외국기술 얻어오기도 힘들어졌습니다.

이제는 우리 자체의 힘으로 성장해야할 상황이 된 것입니다.근검절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걸로 흑자경제가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기술력을 갖춰야할

때입니다.정부든 기업이든 하루속히 과학기술인력을 양성하는데 더 많이

투자하길 기대합니다.”

<프로필>

▶28년 서울 출신▶서울대 자연과학대 동물학과 교수▶서울대 자연과학대

학장▶유전공학학술협의회 회장▶과학기술자총연합회 회장▶서울대

총장▶교육부 장관▶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한국대학총장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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