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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사랑 … 250개 단어 그냥 내 멋대로 적어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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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내가 태어날 때 받은 유산이다. 나는 그 유산을 벌써 다 써버렸다.”

고은(76) 시인이 말하는 그 유산은 ‘시간’이다. 시인이 내린 정의는 사전의 그것과는 좀 달랐다. 고은의 철학 에세이 『개념의 숲』(신원문화사)이 13일 출간됐다. 시간·사랑·행복·민주주의·언어 등 250여 개 단어를 시인 나름대로 규정했다. 지난해 9월 열린 ‘등단 50주년 기념 그림전’에 내놓았던 그의 작품도 35점이 포함됐다. 그림전 당시 내놨던 도록과 비교하자면 인쇄 상태가 썩 좋지는 않아 그림 보는 맛은 다소 떨어진다. 그래도 재주 많은 시인의 머릿속과 가슴속을 골고루 볼 수 있는 조합이다.

고은이 정의한 ‘사랑’은 이렇다. “소유에의 장님. 헌신에의 장님. 이 두 장님만이 사랑을 완성한다.”

‘기억’에 대한 정의는 마지막 한 줄에 반전이 있다. “아, 기억이 비로소 인간을 인간적이게 한다./기억의 딸이/상상이다./상상의 어머니가 기억이다.//기억은 이 세상 이전까지 닿아 있다.//가 버린 세계를 현재에 머물게 하는 유일한 시간의 우정이다. 기억은.//그러나 기억은 거의 틀린 기억이다.”

‘천국’은 250여 개념어 중 가장 간결하게 규정했다. 바로 “없다”다. 반면 “지옥은 이 세계 안에 있다”고 적었다. 예술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권력에 반드시 불필요한 건 ‘광기’란다. “무덤 아니고는 어디에도 파묻을 곳이 없”는 것은 ‘욕망’이다. 그가 정리한 ‘죽음’의 설명도 재미있다. “나 죽을 때 몇 사람 짝짝 박수쳐라.”  

그가 두손 두발 다 든 개념어는 ‘인간’이다. “인간을 정의하지 말자. 인간은 개념화가 불가능하다.”

이 개념어들은 수년 전 프랑스의 한 출판사에서 키워드만 던져주곤 마음대로 정의를 내려보라고 한 데에서 출발했다. 고은 시인은 “그냥 내 멋대로 적어봤다”고 했다. 멋대로 적어낸 글조차 시가 되고 철학이 되는 경지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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