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지도>50. 초창기 촬영감독들 어땠나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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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1919년 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의리적 구투'는 아쉽게도 촬영.편집을 일본인 기사 미야카와(宮川)가 맡아 했다.1926년 제작된 민족영화'아리랑'(나운규 감독)도 촬영을 일본인 가토(加藤參平)가 담당했다.

이땅에 영화가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 불행하게도 일본식민지시대였기 때문에 초창기 영화의 촬영은 거의 일본인 기사가 장악하다시피 했다.그러나 비록 연쇄활동사진극이긴 하지만 1920년 이세기감독의 통속신파극'지기(知己)'를 한국인 이필우(李弼雨)가 촬영함으로써 온전한 한국영화의 새 장을 열게 됐다.

우리나라 촬영기사 제1호인 이필우는 을지로에서 경영하는 시계포에 사진관을 차려놓고 슬라이드와 필름을 돌리곤 했다. 그는 24년 한국인만으로 전 스태프가 구성돼 제작된 최초의 영화'장화홍련전'의 촬영.녹음.편집.현상까지 겸하는등 이후 많은 작품을 촬영했다.

20~30년대에 작품을 많이 내놓은 나운규는 일제에 의한 검열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일본인 촬영기사나 일인과 제휴했지만 한국인 이창용(李創用)과 이명우(李明雨)기사도 많이 기용했다.'풍운아'와'금붕어'를 가토와 이창용이 공동촬영했고'잘 있거라''사랑을 찾아서'는 이창용이 단독촬영했다.또한 이필우의 친동생인 이명우는 30년 나운규의'아리랑 후편''철인도'등을 촬영했다.이명우는 또 나운규 몰락 이후 침체된 영화계에 활력을 넣어주며 32년 데뷔한 신진감독 이규환의'임자없는 나룻배'도 촬영했다.

이밖에 초창기에 활약한 한국인 촬영기사로는 나운규의'옥녀'를 이창용과 함께 촬영한 김재룡(金在龍),카프파인 김유영감독의'유랑'을 촬영한 한창섭(韓昌燮),나운규의'벙어리 삼룡이'를 촬영한 손용진(孫勇進)이 있다.

최초의 촬영기사 이필우는 발성장치를 직접 개발,35년 동생 이명우와 함께 한국 최초의 발성영화'춘향전'을 만드는 개가를 올렸다.이필우가 녹음을 맡았고 이명우가 촬영을,유장산(柳長山)이 촬영과 녹음에 조수로 참여했다.

일제의 문화정치로 검열이 강화돼 한국영화인들은 질식할 듯한 상황에서 문예물 제작에 몰두하게 됐는데 39년 정비석 원작의'성황당'을 촬영한 김학성(金學成)은 이명우의 맥을 이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이명우의 조수였던 그는 일본예술대학을 거쳐 일본영화사에서 수업하다 귀국했으며 한국영화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작품'생명'을 촬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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