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정치의 적응위기 돌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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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보.김현철(金賢哲).대선자금등의 스캔들이 야기한 난국이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청와대와 신한국당이 정치기능을 상실함으로써 나라는 난파선처럼 표류하고 있다.여야 정치권은 국민이 납득할만한 해법을 제시하기보다 대선을 겨냥한 정략에 위기를 이용하고 있어 정국표류가 대선까지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된다.그래서 파국설마저 확산되는 실정이다.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해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이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여기서 우리가 주저앉을 수 없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국가적 위기 앞에서'적응위기(適應危機)'란 정치용어가 생각난다.2년 전 프랑스의 저명한 석학 모리스 뒤베르제 교수와 대화끝에 나온 말이다.그는“자본주의의 발전단계에서 정치가 적응하지 못하면 위기를 맞는다”고 했다.그는 유럽이 30년대에 적응위기를 겪었다면서“한국의 경제발전이 적응위기를 극복해야 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다”고 충고했다.지금 우리가 직면한 위기의 원인이 경제는 2류,정치는 4류라는 말대로 정치가 경제발전에 적응하지 못하는 데 있음이 확실하다.

구미 선진국의 적응위기는 지난 29년 대공황에서 시작됐다.자본주의의 존폐가 거론될만큼 심각한 것이었다.위기극복의 세 가지 방식이 각국의 자본주의 발전 수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독일과 이탈리아는 파시즘으로,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군사독재로 위기를 돌파했다.이 나라들은 자본주의를 수호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민주주의를 잃고 전체주의를 얻었다.미국.영국.프랑스는 정치.경제.사회개혁을 통해 위기를 극복했다.루스벨트의 뉴딜정책과 영.불의 좌우파 공존 합의에 따른 복지정책이 무기였다.뒤베르제는 적응위기가 구자본주의와 신자본주의간의 갈등을 정치가 풀 수 없었기 때문에 왔다고 평가했다.

구미자본주의는 자본과 기술축적을 기반으로 이윤뿐만 아니라 노동복지와 금융부담및 담세등을 고려하는 대기업 중심으로 도약하고 있었다.그럼에도 정치는 19세기형 명사(名士)정당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다.명사정당은 1만여명 정도의 명사들이 선거자금을 부담하고 후보도 하향식 지명과 호선을 한 붕당(朋黨)이었다.돈선거와 비리가 이 때문에 만연했다.좌파정당만이 대중정당으로 등장했으나 맹아단계였다.이러한 정치구조로는 신자본주의로의 이행에 적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그후 우파가 대중정당으로 발전한 것은 붕당구조로는 국가를 관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차대전 후 독일과 이탈리아의 기민당,프랑스의 드골파등 우파가 대중정당으로 정착했고,영국노동당등 유럽의 좌파정당은 자본주의를 관리하는 대중정당의 전통을 계승했다.현대의 대중정당은 정치.경제.사회.문화등의 전문가집단이 명사들을 대체해 당을 운영하는'현대민주주의'의 핵심구조를 형성했다.여기서 적응위기의 세 가지 극복방식 중 민주개혁 방식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해답이 나왔다.2차대전 결과 독일과 이탈리아가,70년대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민주주의에 합류한 것도 이 때문이다.6년 전 공산주의의 몰락도 적응위기의 일종으로 해석되기도 한다.그래서 한국의 선택은 미.영.불형의 민주개혁 방식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국자본주의는 현재 구미 선진권의 첨단 기술자본주의로의 도약단계에 들어서고 있다.그런데 정치는'명사정당'수준에 머물러 비생산적 정쟁에 매몰돼 있는 것이다.3金씨가 공천과 자금등 전권을 독점한 한국의 정당구조는 19세기형 붕당과 큰 차이가 없다.사회계층이 아닌 특정지역을 독점해 집권을 겨냥하는 정당은 사회.경제발전을 오히려 방해한다.형식은 근대적이나 내용은 명사정당과 다름없는 것이 한국정당이다.세계 11위의 경제규모를 갖춘 한국자본주의에 정치가'적응'할 수 없는 정치구조인 것이다.

'적응위기'를 극복하는 임무는 집권세력에 있다.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 최후의 결단을 내려야 할 이유가 이 점에 있다.정치가 경제도약을 방해하지 않고 적응하기 위한 정치개혁이 시급한 것이다.

金대통령은 먼저 차남비리를 사법기관의 엄정한 심판에 맡기고,국가기관의 차남 인맥을 발본색원하며,대선자금의 진실을 국민에게 고백하고 용서받아야 한다.이 조치는 金대통령이 정치개혁을 단행하는 데 있어 정당성을 회복시켜 줄 것이다.정치개혁의 요체(要諦)는 돈선거의 근원인 사조직을 폐지하고 선거를 공조직으로 치르며,사당(私黨)을 시민과 전문가가 참여하는 현대정당 구조로 바꾸는 데 있다.정치의 적응위기를 극복해 난국을 해소하는 길은 여기서 열린다. 주섭일 국제문제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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