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국가지도력 공백을 우려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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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오늘의 정치상황을 보노라면 한국 정치를 일컬어 소용돌이 정치로 비유했던 그레고리 핸더슨의 말이 더욱 실감나게 느껴진다.출세욕과 이권욕에 들뜬 사람들이 떼를 지어 권력의 중심을 향해 소용돌이치듯 모여드는 현상을 핸더슨은 그렇게 표현했다.

사실 한국 사람들은 정치지향성이 강하고 권력의 몸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속성이 지나친 정도다.한국 사회를 총체적 위기상황으로 몰아넣은 한보사태와 현철사건이 이 점을 극명하게 말해준다.일개 부실기업이 권력의 몸체를 매수하고 자신의 축재 욕망을 턱없이 충족시키려다가 자멸의 함정에 빠진 것이 바로 한보사태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권과 출세를 노리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소용돌이 물결이란 무한욕망의 집결체이기 때문에 자제와 통제가 불가능하며 끝내는 권력의 중심마저 침몰시키는 것이 특징이다.이러한 현상은 이승만 정권때부터 지금까지 하나의 풍토병처럼 되풀이 돼 나타나고 있으며,김영삼(金泳三)정부가 겪고 있는 지도력 공백과 국정표류현상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김영삼대통령과 현철씨가 소용돌이 정치의 이러한 비극적 속성을 일찍이 간파하고 경계했더라면 오늘 한국 사회가 직면한 난국과 위기는 어느정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노동법파동에 이어 한보사태와 현철사건및 대선자금문제가 연이어 정치쟁점으로 등장하면서 한국 사회는 순식간에 위기상황에 빠져들게 됐고 이제는 국가공동체가 파산되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다.설상가상으로 대통령의 레임덕 현상까지 겹쳐 한국사회는 마치 난파선처럼 방향감각을 잃고 어디론가 떼밀려가고 있는 느낌이다.

이러한 국정공백 현상이 거의 반년이나 지속됨으로써 국민들의 불안감이 위기수준에 이르렀다.21세기 준비는 커녕 눈앞의 민생현안도 손대지 못하고 있으며 공직기강은 날이 갈수록 문란해지고 있다.이런 상태가 김영삼 대통령 임기 종료때까지 지속된다면 그것은 엄청난 국가적 손실이요,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어리석은 결과를 빚게 될 것이다.

마침 한국대학총장협의회가'나라를 걱정하는 모임'을 갖고 대국민 호소문을 통해 강조했듯이 오늘의 난국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국정최고책임자인 金대통령이 위기극복의 결단을 내리는데 앞장서야 한다.그러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지도력이 신뢰를 회복해야 하며 그것은 모름지기 진실에 바탕을 둬야 한다.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도 강조했듯이 신뢰를 잃은 권위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으며 현실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金대통령이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한보비리와 대선자금 등 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는 모든 의혹사건을 숨김없이 국민 앞에 밝히고 겸허한 자세로 이해를 구해야 한다.국민의 이해와 동참 없이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오늘의 난국을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한편 국민들은 분노와 허탈의 감정을 추스르고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는 대승적인 관점에서 경제살리기를 비롯한 현안 해결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대통령이 남은 임기동안 국정에 충실할 수 있도록 인내를 보이는 것도 한보사태와 현철사건 등에 대해 엄정한 사법처리를 촉구하는 것 못지 않게 성숙한 국민의 자세라고 생각한다.여야 정치인,특히 대선주자들도 한계상황에 처한 공동체 위기는 외면한 채 파워게임과 세불리기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난국부터 해결코자 하는 정치인으로서의 소명의식을 발휘해야 한다.야당도 오늘의 정국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정치공세를 삼가고 국정파트너로서의 책임윤리를 먼저 생각하는 국민정당의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대통령과 여야 정치인,그리고 국민의 지혜를 함께 모아 이 난국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새로운 역사의 새벽을 힘차게 열어가길 바란다.

김호진〈고려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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