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 다시 산 두 화가 박수근.변관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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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19세기말 인상파 화가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을 그리려고 점으로 빛을 부쉈다.이른바 점묘파다.

20세기중반 한국이란 가난한 나라에 살던 두 사람의 화가도 무수한 점을 찍어 그림을 그렸다.

그들이 부순 것은 빛이 아니라 시대의 궁핍과 가난이 옭죄어온 가슴속 울분이었다.

박수근과 변관식.서양화와 동양화라는 물과 기름처럼 별개의 장르에서 활동한 두 사람이다.그렇지만 두 사람은 닮은데가 많다.

화폭위에 수백,수천의 붓방아를 찍어가며 정겨운 한국의 풍경을 그렸고 그속에 한국인의 마음을 담으려 했던 것이 그렇다.

생전에 화려한 길을 걷지 못한채 죽고 나서야 '아!좋은 작가구나'하는 탄식섞인 평을 들었던 점도 비슷하다.

서울인사동 노화랑은 15일까지 '박수근 vs 변관식'전을 열고 있다.

박수근(1914~65)의 소개작은 그에게 미국인 밀러여사의 주문이 이어지며 생활이 조금 안정됐던 60년대를 중심으로 9점.변관식(1899~1976)작품 9점도 생의 후반인 60~70년대 작품이 중심을 이룬다.

대작.대표작은 아니지만 안정기에 들어선 만년의 작품들이기에 특징을 살펴보는데는 무리가 없다.

한때 박수근은'집과 오후(그림제목)는 인상파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라고 밀러여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마른 붓끝에 물감을 찍어 점처럼 눌러댄 것은 영락없는 점묘파수법이다.그러나 박수근 앞에서 '인상파의 영향'이란 말은 쓰지 않는다.밀러여사에게 보낸 또다른 편지에서'저는 흰색을 많이 씁니다.언제나 흰색물감이 모자랍니다'라고 쓴 것처럼 그는 회색이나 옅은 노랑위에 흰색의 점을 뭉개 우툴두툴한 화강암이나 퇴락한 흙벽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태양 아래 반짝이는 신흥 부르주아들의 활기를 그린 인상파작가들의 꿈과는 그가 정반대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앙상한 고목이나 함지를 이고 가는 아낙네,굽은 등을 웅크린 노인처럼 박수근 그림의 등장물은 언제나 말이 없다.비바람에 씻길수록 따스함이 더하는 화강암처럼 말없음 속에 시대의 초상을 그려넣으려 한 바람 때문이다.

변관식은 언제나 그의 그림속에 자신을 그려넣었다.죽장을 집고 허위허위 길을 재촉하는 모습이 그림속의 변관식이다.그는 구한말 마지막 화원인 외조부 조석진에게 이끌려 그림을 배웠다.그가 배운 구식그림은 금세 용도폐기됐다.

그래서 새로 들어온 서양화의 대척점에 서있는 동양화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한다고 평생 고민했다.그의 그림이 역동적이며 반항적이기까지 한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실제 그는 30년대 후반 훌쩍 떠나 금강산일대를 방랑했다.59년에는 국전의 심사비리를 폭로하고 재야작가로 돌아섰다.

변관식은 자신을 찾아온 내방객을 맞아 담소를 나누면서도 붓은 계속 점을 찍고 있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동양화에 미점(米點)산수라는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그는 화보속의 미점법을 꺼내 금강산그림은 물론 자신이 피난갔던 진주일대의 야산을 그렸다.

정형산수에 실경을 더했다는 평이 그것이다.말하자면 변관식의 점들은 한국산의 모습이 어떤 것이며 그 산을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이 언제나 산산이 부서져 있음을 말해주는 연속기호였던 것이다.

노화랑은 비교전시의 후속기획으로 거장 겸재(謙齋) 정선(鄭敾)에 비길만한 작가를 찾고 있다.

윤철규 미술전문기자

<사진설명>

한국성을 찾아가는 회화기호로 점을 사용했던 박수근과 변관식.그림은 박수근의'시장'(19×33㎝.)과 변관식의'무창춘색'(30.5×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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