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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하는 여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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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762년 러시아 황후 예카테리나는 남편 표트르 3세를 축출하고 황제(예카테리나 2세)가 됐다. 반란군 주역은 그의 정부(情夫)인 그레고리 오를로프 백작이었다. 예카테리나는 평생 열 명이 넘는 애인을 뒀다. 그들에게 사랑뿐 아니라 충성을 요구했다. 총애를 믿고 방자하게 구는 자는 가차없이 내쳤다. 재위 34년간 어떤 남성도 그의 절대 권력을 흔들지 못했다.

16세기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죽는 날까지 독신을 고집했다. 한편으론 갖은 교태와 다감한 편지로 기사(騎士)들의 애를 태웠다. 전장에서 그들은 여왕의 이름을 부르며 기꺼이 죽어갔다. 엘리자베스는 외국 구혼자들도 같은 방식으로 다뤘다. 정세에 따라 스페인 왕 필리페 2세, 프랑스 왕 샤를 9세, 스웨덴 황태자 에릭 등과 혼약과 파혼을 반복했다. 이로써 ‘처녀 여왕’의 명예와 정치적 이득을 함께 취했다.

위서(僞書)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 필사본엔 신라 선덕여왕이 남편 넷을 맞는 얘기가 나온다. 공주 시절 첫 남편은 풍월주(화랑의 우두머리) 용춘이었다. 둘 사이에 후사가 없자 아버지 진평왕은 한때 후계자로 생각했던 용수에게 선덕을 모시게 한다. 용수는 선덕에게 왕위를 양보한 언니 천명공주의 남편이자 용춘의 형이었다. 여기서도 아이를 얻지 못한 선덕은 즉위 뒤 다시 흠반과 을제를 남편으로 삼는다. 후계 논란을 잠재워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세 여왕에겐 지순한 사랑에 몸 던질 여유 따윈 없었다. 소녀 시절부터 살얼음판 같은 궁정에서 힘겹게 목숨을 이은 처지였다. 불같은 야망으로 권력의 정점에 섰지만 주변엔 온통 남성뿐. 그들을 휘어잡지 못하면 내일은 없었다. 여왕들은 다행히 유혹당하기보다 유혹하는 자가 됐다. 암살과 반란의 공포를 딛고 역사의 승자가 됐다. 후대엔 비록 색을 탐한(선덕여왕) 음탕한 내숭쟁이(엘리자베스 1세)로 비난받았더라도.

KBS 드라마 ‘천추태후’가 인기다. 정사(正史) 속 그는 가부장제의 도덕률을 유린한 탕녀다. 드라마는 그를 애국심에 불타는 여장부로 재해석할 참이다. 다만 걸리는 것은 드라마 속 천추태후(채시라 분)가 막무가내로 호전적이며 정에 약한 여성인 점이다. 5월에는 드라마 ‘선덕여왕’(MBC)도 전파를 탄다. 이들 작품이 주인공들을 그저 고결한 민족영웅으로 박제화한다면 지하의 두 여걸은 오히려 쓴웃음을 지으리라.

이나리 경제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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