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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이 머무는 공간 ①인사동 쌈지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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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호 31면

① 2층 난간에서 본 쌈지길의 내부 모습. 마름모꼴 마당을 둘러싼 램프를 따라 달팽이처럼 오르다 보면 하늘에 다다른다. ②자동차 궤적이 쌈지길 앞 인사동길에 뱀처럼 늘어서 있다. ③ 쌈지길은 길 같은 건축이다. 안과 밖이 구분이 잘 안 되는 곳이다. 내부가 들여다 보이는 건물 전경. 신동연 기자

서울 인사동의 쌈지길은 길이 아니다. 공공의 길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쌈지길을 아는 많은 시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2년 전 쌈지길은 3000원 입장료를 받았던 적이 있다. 네티즌이 거세게 항의하는 등 시민의 반발이 이어졌다. 결국 입장료를 받는 일은 며칠 만에 백지화됐다. 쌈지길은 엄연히 사유지이지만 시민은 그곳을 공공 장소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시민의 인식은 쌈지길의 건축적 발상과 맞아떨어진다.

길을 건물 안에 끌어들여 자연과 도시를 소통시키다

쌈지길을 설계한 최문규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강렬한 발상으로 건축을 시작했다. 인사동 길을 건축 안으로 끌어들이자. 길뿐만 아니라 길로 건축을 만들자. 하늘로 열린 마당을 가운데 두고 길 따라 사람들은 쇼핑을 하고, 사람 구경을 하고, 수시로 변하는 도시의 풍경을 즐긴다. 건축이 길이 되고 길이 건축이 되었기 때문에 공공의 길과 사유의 건물이 혼돈될 수 있었던 것이다.

건축가 민현식은 쌈지길을 두고 “길을 건축화했다기보다 건축을 길로 구축”했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 길의 모양을 가진 건물이 아니라 길거리와 골목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건물 안으로 끌어들인 건축이다.

쌈지길은 무엇보다 사람을 구경하는 곳이다. 내가 구경꾼이면서 남들이 나를 구경하는 곳. 가운데 마당이 무대이고 빙빙 둘러싼 램프가 청중석이라 생각하기 쉽다. 무대와 청중석은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건축가가 이 공간의 상대적 크기, 흔히 건축에서는 말하는 스케일을 적절하게 잡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고 시선을 마주칠 수 있는 인간적인 스케일인 것이다. 건축가는 이런 스케일을 지키면서 다양한 공간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건물을 만들었다. 쌈지길의 마당은 뒤틀린 마름모꼴이어서 마당을 둘러싼 램프의 길이가 모두 다르다. 길이가 긴 북서쪽 램프에서 좁아지는 마당 쪽을 바라보면 원근법적 효과가 생겨 공간이 깊고 크다. 반대편 좁은 변의 램프에 서서 바라보면 공간이 아담하고 편안하다.

길을 건물 속에 넣은 것은 쌈지길만의 독특한 발상은 아니다. 코엑스 몰과 같은 규격화된 대형 쇼핑몰, 소위 멀티플렉스의 복도 공간에서도 사람들은 길을 따라 움직인다.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가듯 평행선상에서 뒤쫓고 마주치고 스쳐 지나간다. 그곳은 자연과 도시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폐쇄된 인공의 세계다.

쌈지길은 다르다. 도시의 길을 따라 거닐 때처럼 자연과 도시를 함께 느끼는 즐거움이 있다. 등지고 있는 햇빛이 마주치는 청년의 얼굴을 밝게 비추어 준다. 코너를 두 번 돌면 그 햇빛이 나의 눈을 부시게 한다. 비가 내리면 척척하고, 겨울 바람이 불면 춥다. 그래서 가게 속을 들어갈 때 집 안의 편안함을 느끼는 곳이다. 자연과 함께 도시의 모습도 달라진다. 램프를 따라 움직이면서 우리의 시선은 우선 가까운 곳, 갖가지 사람과 물건, 쌈지길 옆에 있는 건물과 간판에 머문다. 램프를 따라 서서히 올라가면서 하늘이 마당의 마름모꼴 속에 잡힌다. 하늘이 가까워진다. 옥상에 올라가는 순간 창틀에 잡혔던 하늘이 사방으로 열리면서 가까운 곳에 머물던 시선이 먼 도시의 풍경으로 확장된다. 나의 움직임과 함께 변하는 도시의 풍경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계속 일깨워 준다.

쌈지길은 1990년대 젊은 한국 패션의 아이콘이었던 쌈지가 문화와 쇼핑을 도심에서 접목시키려 했던 야심 찬 프로젝트였다. 2001년 그 자리에 있던 영빈가든이 화재로 소실된 후 쌈지는 그 땅과 함께 위기에 처한 주위의 가게들을 소유하게 된다. 건축가는 쌈지길의 상업적 기능과 함께 인사동이라는 역사적 도시 지역의 느낌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어려운 과제를 풀어야 했다.

쌈지길이 만들어지는 데는 길고 복잡한 과정이 있었다. 건축가는 건축을 길이라고 규정하면서도 인사동 길의 모습을 답습하지 않는다. 한순간 인사동 길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건축 재료를 모두 생각하지만 다음 순간 콘크리트·전벽돌·나무 등 몇 가지 재료만 사용하기로 한다. 모든 램프가 마당을 향해 모아져야 될 것 같은 순간 가장 긴 램프를 인사동 길을 향해 열어 놓는다. 마당이 쌈지길의 중심이되 그 중심을 조금 흐트러뜨린다. 시선이 자유로워지고 풍경이 다양해진다. 건축의 전문 영역 안에서는 쉽지 않은 이런 디자인 과정이 소통될 수 있어야 한다. 최문규라는 건축가의 상상력, 그의 디자인 방식은 적어도 건축학도라면 공유하면서도 비판할 수 있는 건축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쌈지길이 개인 소유 부동산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도시적 공공 영역의 일부이어야 마땅하듯이 그 건물을 가능케 했던 건축 지식이 한국 문화의 공공 자산이다.

쌈지길은 인사동 길 변에 있는 가장 큰 건물이지만 인사동 길에서 눈에 띄는 건물은 아니다. 마당 안에서 서성거리면서, 램프를 거닐면서 쌈지길의 건축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이 건축이 아니다. 쌈지길을 가능케 했던 과정과 지식, 기술과 상상력이 있다. 물론 일반인이 이 과정까지 보기는 어렵다. 가장 훌륭한 건축주는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 자기의 희망을 피력할 줄 안다는 것이다. 건축이 우리에게 다가서는 것은 말을 통해서가 아니지만 우리는 건축에 대한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은 건축의 모양이나 재료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인사동에 있으니 한옥을 닮아야 한다, 기와지붕을 씌워야 한다는 이야기에서 벗어나 인사동의 도시적 공간 속에 전개되는 일상에서 출발했다. 그것이 쌈지길의 큰 힘이다. 필자가 쌈지길을 좋아하는 이유는 일상의 공간이면서도 강렬한 건축적 발상으로 풍부한 이야기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다.

쌈지길을 배회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그 공간의 주인공이자 관람객이란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쌈지길은 무대이고 사람들과 쇼윈도와 상품이 주연”이라는 김진애(노무현 정부 대통령자문 건설기술위원장)의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도, 그 사실을 잘 알고 그렇게 행동한다. 일상의 나날, 체험의 흐름 속에서 건축은 의식되지 않는다. 그 자체가 언어로 표현되는 경우도 많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건축을 의식하지 않더라도 건축에 대해 잘 안다. 건축을 사용하고, 그 속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사실은 아주 잘 안다. 쌈지길을 찾아가는 개개인의 일상적 이야기가 여기서 펼쳐진다. 건축이라는 전문 영역에서 깊이 생각하고 비판할 수 있는 건축 이야기들의 시작이다. 건축은 ‘단지’ 건물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의지를 담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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