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스물의 더블 드래건 월드컵을 부탁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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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호 16면

‘젊은 용’ 이청용(왼쪽)과 기성용이 한국 축구의 미래를 짊어졌다. 사진은 지난해 10월 11일 우즈베키스탄과의 경기에서 득점한 뒤 환호하는 기성용과 이청용.

‘H-H 라인’이라는 말이 있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축구 공수의 대들보였던 홍명보와 황선홍의 알파벳 이니셜을 딴 조어였다. 최근까지는 ‘양박(兩朴)’이 대세였다. 박지성과 박주영. 그 뒤를 잇는 걸출한 듀오가 나타났다. 용 두 마리가 무섭게 꿈틀대고 있다. 프로축구 FC서울의 ‘더블 드래건’ 기성용(20)과 이청용(21)이 주인공이다. 이제 스물을 갓 넘긴 애송이들이지만 소속 팀은 물론 대표팀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주축이다. 최근 축구 전문지 ‘베스트 11’이 실시한 ‘한국 축구를 이끌 차세대 주자’라는 설문에서 기성용과 이청용은 나란히 1, 2위를 차지했다.
 
다음 동작 생각하며 움직여
기성용과 이청용은 기존 한국 축구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스타일로 공을 찬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한국 축구의 떠오르는 희망, 기성용·이청용

기성용은 공을 받은 후 움직임이 한 박자 빠르고 부드럽다. 단순히 민첩성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다음 동작을 미리 생각하며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고 편하게 공을 차는 느낌을 준다. 좁은 밀집 지역에서 공을 잡아도 기성용은 좀처럼 당황하는 법 없이 공의 줄기를 살려 낸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생각하면서 스스로 상황을 타개해 나가는 능력이 있다.

한국 축구의 약점으로 지적되는 게 개인기 부족이다. 유럽과 남미는커녕 중동 선수에게도 뒤진다. 개인기만 놓고 따지면 동남아 수준과 비슷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듣는다. 어려서부터 일대일 개인 돌파보다 동료와 패스를 통해 상대를 제압하라는 지시를 듣고 커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K-리그에서는 토종 선수들이 과감하게 일대일 돌파를 시도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이청용은 예외다. FC서울의 팬들은 슬쩍 상대 수비수를 따돌리고 번개같이 상대 측면을 파고드는 이청용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개인기로 상대 수비를 한 꺼풀 벗겨 내면 단숨에 균형이 무너지며 찬스가 생긴다. 이청용이 각광받는 이유다.

일대일 돌파로 상대방 균형 깨
‘쌍용’이 한국 축구의 기존 관습에서 벗어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기성용은 중학교 1학년부터 4년 반 동안 호주에서 유학하며 공을 찼다. 정규 수업을 모두 듣고 방과 후에만 김판근 축구교실에서 축구를 익혔다. 기성용은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매일같이 훈련하는데 나는 이렇게 공부를 다 하고 공을 차도 될까 고민했다. 더 오래 축구를 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 힘들었다”고 그 시절을 회상했다.

기성용은 불안했지만 호주의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생각하는 축구’가 만들어졌다.
기성용의 아버지 기영옥(광양제철고 교사)씨는 금호고에서 고종수·윤정환·남기일 등을 키워 낸 축구 지도자다. 아버지는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고종수를 배우라”며 왼발 사용을 권하고, “미드필더는 8개의 눈이 있어야 한다”고 다그쳤다. 무서운 호랑이 감독이었지만 고교 시절에는 강훈련보다 중요한 것이 있음을 잘 알기에 호주로 아들을 보냈다. 기성용이 영어를 구사하게 된 것도 호주 유학의 또 다른 성과다.

이청용은 일찌감치 학업을 포기하고 프로 무대에 뛰어들었다. 도봉중 3학년 때 FC서울의 입단 제의를 수락했다. 병역 면제라는 혜택을 받았지만 학벌이 중시되는 사회에서 학업 포기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는 “가끔 남들처럼 고등학교·대학교에 진학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후회하고 걱정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오히려 축구가 아니면 할 게 없다는 생각 때문에 더 열심히 한다”고 말했다.

서울에 입단한 이후 이청용은 완전히 다른 환경에 놓이게 됐다. 흙먼지가 이는 운동장이 아니라 융단 같은 초록 잔디 위에서 훈련하게 됐다. 눈앞에 승부에 연연해 선수들을 육성하는 아마추어 팀과 달리 장기적 안목으로 성인 무대에서 통할 수 있는 실력자를 키워 내는 곳에서 이청용의 개인기는 무르익었다.
 
눈물 젖은 빵 먹던 시절
이청용과 기성용에게도 눈물 젖은 빵을 먹던 시절이 있었다.
이청용은 “2군에만 머물던 시절에는 오히려 맘이 편했다. 그런데 1군과 2군을 오가려니 정말 지쳤다”며 2006년을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꼽았다. 이청용은 2006년 4경기에 출장하는 데 그쳤다.

2006년 입단한 기성용은 선배들을 뚫고 주전으로 자리 잡는 게 까마득하게만 보였다. 기성용은 “1군 무대를 누비는 또래가 있다는 게 충격이었다. 자신을 더 채찍질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한 살 터울이지만 생일이 6개월밖에 차이 나지 않는 둘은 금세 친해졌다.

이듬해 터키에서 온 귀인이 그들의 축구 인생을 바꿔 주었다. 세놀 귀네슈 감독이다.
2007년 부임한 귀네슈 감독은 겨울 훈련을 하면서 기성용과 이청용의 재능을 눈여겨봤다. 귀네슈 감독은 두 유망주를 따로 불러 “주전으로 뛸 수 있는 재능이 있다”고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시즌 초반부터 기회를 줬다. 2007년 FC서울은 7위로 시즌을 마쳤지만 기성용과 이청용은 K-리그 무대에 굳건히 뿌리를 내렸다. 귀네슈 감독이 아니었다면 ‘쌍용’은 아직도 2군 경기에 나서고 있었을지 모른다. K-리그와 더불어 2007년 캐나다 세계청소년 선수권, 2008년 시드니 올림픽 등에서 국제 경기 경험을 쌓은 그들은 마침내 성인 대표팀에서도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기성용은 지난해 9월 A매치 데뷔 2경기째인 북한전에서 동점골을 터뜨리고, 10월 우즈베키스탄전에서도 골을 넣어 2경기 연속 골을 기록했다. 기성용은 2002 한·일 월드컵의 주역 김남일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 지난해 11월 열린 사우디아라비아전에서 김남일은 부상이나 다른 이유가 없었음에도 대표팀에 발탁되지 않았다.

이청용은 대표팀의 주전 오른쪽 윙포워드로 자리를 굳혔다. 허정무 대표팀 감독이 즐겨 쓰는 4-3-3 포메이션에서 왼쪽 윙포워드 박지성과 짝을 이루는 포지션이다. 스타일이 다르고, 경험에서도 뒤지지만 이청용의 플레이에도 박지성이 지니지 못한 장점이 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의 꿈
쌍용의 꿈은 이제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향하고 있다. 대표팀은 2승1무로 사우디아라비아·이란·북한·아랍에미리트 등이 포진한 아시아 최종 예선 B조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조 2위까지 남아공에 직행한다. 남은 5경기에서 3승만 더하면 1986년 멕시코 대회 이후 7회 연속 본선에 진출한다.

월드컵 본선이 열리는 내년 기성용은 21세, 이청용은 22세가 된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할 때 이동국은 19세였다. 2002년 박지성은 20세였다. 2006년 박주영은 21세였다. 월드컵은 그들 축구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이동국은 혜성같이 스타로 떠올랐다. 박지성은 4강의 영웅이 돼 대회를 마친 후 히딩크를 따라 유럽으로 진출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가는 길이 월드컵에서 시작된 셈이다. 한때 불꽃처럼 타올랐던 박주영은 독일 월드컵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 주지 못한 후 2년 넘게 슬럼프에 빠져들었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월드컵을 경험했지만 그 이후 축구 인생은 이렇듯 저마다 달랐다.

기성용과 이청용에게도 월드컵은 중요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K-리그에서는 통하지만 기성용이 세계무대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넓은 시야를 과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춤을 추는 듯한 이청용의 드리블과 돌파가 먹힐지도 자신할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은 빨리 해외에 진출하기를 원하고 있다. “실패하더라도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하고, 그 실패를 통해 배우겠다”는 것이다. 기성용은 2010년, 이청용은 2012년까지 FC서울과 계약돼 있다. 구단은 계약 기간을 채우길 바라지만 조건이 맞는 구단이 나타난다면 당장 떠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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