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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의 기억은 많을수록 좋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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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몇 주 전 드라마작가 노희경(42·사진)씨의 첫 산문집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첫 산문집이라고? 그동안 다른 책을 낸 적이 있지 않았던가…. 많은 이들이 그렇게 느끼는 데엔 여러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노희경이 작가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드라마를 쓰는 이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고, 그가 쓴 극중 대사들이 ‘밑줄 그으며’ 읽는 것과 유사한 경험을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첫 산문집이 맞다. 서울 가회동 김영사 한옥 사옥에서 그를 만났다.

“산문에 대한 향수는 항상 있었어요. 드라마에서는 캐릭터를 통해 말하지만 산문에서는 오롯이 내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으니 많이 다르지요. 쉼표 하나 마저도 완전히 ‘내 것’이 되는 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산문 쓰는 법을 잊지 않기 위해 쓴 것이기도 하고, 내가 경험하고 느낀 것을 몸으로 기억하기 위해 썼던 글입니다.”

새로 쓴 것은 자신의 기억 속에서 늘 ‘악역’을 맡아왔던 아버지와의 화해에 대해 쓴 ‘미안한 아버지에게’, 작가로서 만난 배우 나문희씨에 대한 단상인 ‘배우 나문희에게 길을 물어가다’ 등이다. 그런데 독특한 기류가 엿보인다. 첫머리에 쓰인 ‘첫 사랑에게 보내는 20년 후의 편지’부터 엄마 이야기까지 노희경은 모든 기억에서 과거의 분노와 원망은 다 증발시켜버린 듯하다. 그는 자신의 글을 통해 기억 속의 사람들에게 미안하다고 나지막이 읊조리고 있다. “죽고 싶다는 생각과 자기 자신이 쓰레기같다”는 생각에 시달렸다는 20대를 돌아보면서도 이제 그는 “아픔의 기억은 많을 수록 좋다”고 말한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면모는 최근에 그가 썼던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이 낮은 시청률로 종영된 데에 대한 소감을 물었을 때도 같았다. 그는 “갈수록 내 잘못이 잘 보인다”며 “사람들 얘기도 충분히 듣고, 아쉬웠던 부분을 기록하고 있다”며 웃었다. 전에는 ‘당신이 이해하지 못한 거다’라며 변명하느라 에너지를 다 썼는데, 이젠 그런 에너지와 시간이 아깝단다.

노희경은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에게 상처주고 잘못했던 일만 자꾸 떠오른다”며 “이젠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평생 바람피우며 엄마에게 고통을 안겨준 아버지도 ‘그의 입장’이 되어 바라보니까 그것도 용서가 되더라면서.

마흔 넘은 나이에 미혼이라 혼자 틀어박혀 글쓸 것 같지만, 몇년 전부터 언니 가족과 조카 등 일곱 식구가 함께 살고 있다. “내 인생에 가장 자랑스럽고 잘한 일은 이렇게 가족들과 합친 일”이라고 털어놓는 그는 “더불어 사는 게 사람을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를 날마다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매일 아침에 108배를 하고 틈틈이 명상을 하는 데서 큰 힘을 얻는다는 그는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이 유죄”라고도 했다. 그의 산문집은 출간된 지 3주만에 9만 부가 팔렸다. 반응은 엇갈린다. ‘이미 보았던 글들이다’, ‘일러스트가 이상하다’며 실망을 표한 독자들도 없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알고 있다”며 “책을 위해서 따로 글을 쓰지는 않았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미안하다”고 말했다.

글=이은주 기자, 사진=권일운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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