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있는 진보, 없는 보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며칠 전 어릴 적 친구를 만났다. 반장을 도맡아 했던, 똑똑하고 착하기 그지없는 친구다. 10년 가까이 못 만났던 터여서 참 반가웠다. 같이 점심식사를 하는데 밥이 넘어가질 않았다. 일류대 인기학과를 나온 그는 졸업 후 증권회사에 들어갔다. 잘 다니고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몇년 전 실적을 올리기 위해 고객 돈을 맡아 대신 굴려주다가 주가가 폭락하는 바람에 큰 손해가 났다고 했다. 고객이 '고소하겠다'고 서슬 퍼렇게 나오는 바람에 집을 팔아 손해를 물어주었다. 그걸로도 안돼 회사를 자진 퇴직했고, 그때 받은 퇴직금까지 다 주었다.

실직한 뒤 카드로 연명했는데, 빚이 빚을 낳아 신용불량자가 됐다. 이젠 어느 금융회사에서도 돈을 빌릴 수 없게 됐다. 신불자 딱지 때문에 신원조회에 걸려 직장을 구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 얼마 전 전 직장 동료의 도움으로 조그만 회사에 가까스로 취직해 한달에 60만원쯤 받고 있다. 집은 서울 근교에 사글세로 살고 있다. 딸이 지난해에 명문 대학에 합격했다. 하지만 "아빠가 능력이 없어 못 보냈다"고 했다. 그런데 독학으로 1년을 더 공부한 딸이 이번에는 같은 대학에 장학생으로 합격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엉엉 울었다. 너무 슬프고, 속 상하고, 친구에게 미안했다.

국민소득이 1만달러를 넘었다는데, 주변에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는 사람이 많은지. 예부터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400만명에 달하는 신용불량자들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우리 국민 중 스스로를 하류층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27.1%나 된다고 한다. 여기에 '중산층이지만 그중에선 하류'라고 한 45.9%까지 합치면 자신을 '중간 이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네명 중 세명 꼴이다. <본지 6월 3일자 1, 6면>

각종 조사에서 나타났듯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과제인 빈부갈등을 치유하는 데 이젠 천착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가난한 사람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고, 부자들은 제대로 부(富)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구체적인 치유법은 사실 쉽지 않아 보인다. 일단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 못 가진자에게 나눠주는 식'은 곤란하다. 그렇지 않아도 '부유세(稅)'등 이야기가 나오면서 돈이 자꾸 해외로 빠져나가 미국 LA의 부동산 값이 치솟을 정도인데, 가난한 사람만 남아선 가난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겠는가.

요즘 스웨덴식 해법(재벌이 기업을 안심하고 운영하게끔 지배권을 인정해주되, 세금을 많이 걷어 복지에 쓰는)이 강력히 대두되고 있다. 또 박상용 연세대 교수가 제안한 것처럼 경기가 좋을 때 기업의 순익 일부를 퇴직보상 기금으로 적립했다가 경기가 나빠져 감원해야 할 때 퇴직자에게 분배해 회사를 살리고 퇴직 당사자도 살 수 있게 하는 방식(본지 5월 21일자 27면)도 유력하다.

윈-윈으로 가려면 어떤 방식이든 상대방을 이해하고, 자기부터 양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 점에서 최근 어느 지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심금을 울렸다.

"보수다, 진보다 하는데 우리가 살 길은 '있는 진보', '없는 보수'가 많이 나오는데 있지 않나 싶습니다. 흔히 보수는 가진 자들이 기득권을 지키려는 성향, 진보는 안 가진 자들이 바꿔보려는 성향으로 인식이 되지요. 그러나 이래서는 대립만 남습니다. 가진 자들은 기득권에 안주하려 하지 말고(있는 진보),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은 가진 자들의 기득권을 인정해주는(없는 보수) 상생(相生)적 사고를 해야 세상이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민병관 산업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