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세계 보건위기는 막을 수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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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네바에 있는 세계보건기구(WHO) 본부 지하 1층에는 ‘이종욱 벙커(JW Lee SHOC room)’가 있다. 전 세계 전염병 발생을 감시하기 위해 24시간 운영되는 상황실이다. 높은 벽에는 이종욱 전 사무총장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그리고 인터넷에는 민간이 운영하는 전염병 발생 감시 사이트인 프로메드(PROMED)가 있다. 이처럼 세계 전염병 위기는 WHO와 인터넷 상에서 항상 감시·보고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의 소말리아에서는 5명 중 1명이 전염병으로 다섯 살 이전에 숨진다. 짐바브웨에서는 에이즈와 콜레라가 무섭게 확산되고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를 강타했던 멜라민 파동처럼 식품 위생 문제도 심각하다. 이에 맞서 세계 167개국이 국제 식품안전 당국자 네트워크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세계식량기구와 국제수역사무국, WHO의 공조 또한 궤도에 올랐다. 그 결과 과거에는 모르고 지나쳤던 위기들이 지금은 공개적으로 토론되고, 정보 교류와 공동 대응이 이뤄지고 있다.

원인과 치료법이 불분명한 신종 인플루엔자가 발생한다면 한국이 속해 있는 서태평양 지역이나 동남아 지역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 보건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지구적 시스템과 적합한 인물, 그리고 재정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서태평양 지역은 운영과 대응 능력이 가장 뛰어난 지역이다. 게다가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SARS)과 조류 인플루엔자(AI)를 성공적으로 관리해 낸 경험도 갖고 있다. 홍콩에서 사스에 이어 AI가 유행했을 때 홍콩 보건장관으로서 가금류 100만 마리를 살처분하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던 마거릿 찬이 현재 WHO의 수장으로 있다.

2000년부터 유엔을 중심으로 WHO와 유엔아동기금(UNICEF), 게이츠 재단, 세계은행 등이 힘을 합해 에이즈, 결핵, 그리고 말라리아 등에 대항하는 글로벌 펀드를 설립했다. 각국이 여기에 동참해 현재까지 140개국에서 149억 달러의 재원을 마련했다. 지난해 일본에서 열린 G8 정상회담에서는 보건 발전을 위해 G8 차원의 별도 기금을 마련키로 했다.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보건·사회 분야의 사회안전망을 비교적 튼실하게 갖췄다. 올해 보건복지부 업무보고에 나와 있듯이 의료비 부담 때문에 신빈곤층으로 추락하는 사례를 막기 위해 의료비 긴급 지원제도도 마련했다. 신빈곤층으로 일단 추락하면 다시 되돌려 세우기는 어렵다. 따라서 신속한 집행이 중요한데 이에 대한 계획도 그 내용에 포함돼 있다.

이달 19일 제네바에서 열리는 WHO 집행이사회에서는 미국발 금융·경제위기에 따른 대책이 논의된다. 미국발 위기가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실물경제 위기가 본격화될 경우 취약 인구집단에 미칠 보건의료적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각국의 경험과 의견을 공유하는 자리를 마련키로 한 것이다. 여기서 한국은 반세기 동안의 보건 개발과 외환위기 극복 경험을 소개하면서 성공적인 보건위기 대응책과 보건의료 발전 틀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WHO는 실제 질병관리 사업 경험을 중심으로 의제를 토의하고 집행했다. 그러나 2003년 사스 사태를 계기로 WHO는 보건위기를 정의하고, 보건 사찰까지도 가능한 ‘국제보건규칙 2005’와 같은 국제 법규를 제정하는 등 새로운 활동을 하고 있다. 신종 전염병으로 인해 전 세계가 보건위기에 빠질 수 있는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이와 함께 WHO는 보건의료의 지적 재산권 문제, 장기와 조직 이식 시행 과정에서의 윤리적 기본원칙, 국제 보건의료 인력의 채용에 대한 실행 규정 제정 등을 통해 제도 정비와 교류 문제 등도 토의하기 시작했다.

보건위기 대응시스템은 국제적으로, 국내적으로 진화하고 있다. 지난 50년 동안 한국의 보건의료 발전 과정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이었다. 한국의 체화된 경험을 개도국들은 필요로 하고 있다. 이제 한국도 보건의료 분야에서 국제적인 리더로서의 역할을 할 때가 됐다. 이를 위해서는 인력 양성과 인프라, 시스템 구축에 대한 국가적 지원과 관심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우리의 경험과 노하우가 현장에서 실제적인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인색한 국가 이미지에서 벗어나 국제사회에 대한 기여도 높여야 한다.

새해엔 덕담이 제격이지만 경제위기로 모두가 앓는 소리뿐이다. 하지만 보건위기는 막을 수 있다고 나는 덕담을 해야겠다.

손명세 연세대 교수·보건대학원

◆약력:연세대 의학과 졸업. 연세대 보건대학원 교수, 대학의학회 부회장, 세계보건기구(WHO) 집행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