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입으로만 전쟁 치른 ‘웰빙정당’ 한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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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정신력은 물질보다 세 배의 가치를 갖는다”고 말했다. 병력 수가 많아도 정신무장이 해이하면 전쟁에서 이기기 어렵다는 뜻이다. 한나라당은 지난해 12월 ‘법안 전쟁’을 선언하면서 “연말까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중점 법안을 처리하겠다”고 장담했다. 172석이란 압도적 병력을 믿은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한나라당의 패배로 끝났다. 주요 쟁점 법안 중 처리한 게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민주당 의원들이 본회의장 농성을 풀면서 축제 무드였던 것을 보면 승패의 추가 어땠는지 자명하다. 왜 이렇게 됐을까.

6일 밤에 열린 한나라당 의원총회를 보면 답이 나온다. 홍준표 원내대표의 합의안을 추인하기 위해 모인 이날 의총에서 100여 명의 의원 중 발언을 신청한 의원은 고작 6명에 불과했다. 국민에게 처리를 다짐하던 법안들이 모조리 뒤로 밀린 합의안이었는데 형식적인 반발조차 거의 없었다는 얘기다.

10여 일째 계속된 비상대기 상황이 피곤하니 이쯤에서 털어버리자는 분위기가 대세였다. 본회의장에서 밤에 잠을 잘 때도 등산용 안전도구를 몸에서 풀지 않았던 민주당 의원들의 투지와는 비교가 안 된다.

한나라당은 김형오 국회의장이 직권상정을 안 해줘서 쟁점 법안 처리를 못했다고 원망한다. 과연 그 이유 때문만일까? 민주당 특공조 의원들이 당운을 걸고 국회 본회의장에 잠입하던 순간 한나라당 의원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100여 명에 불과한 국회 경위들이 300명이 넘는 민주당 관계자들과 육탄전을 벌일 때 한나라당 의원들은 뭘 했을까. 한나라당은 궂은 일은 전부 의장과 경위들에게 떠넘긴 채 입으로만 전쟁을 치른 게 아닐까.

전쟁을 하겠다면서 집안 단속도 시원찮았다. 당 지도부가 연일 ‘연내 처리’를 외쳤지만 비주류 의원들 사이에선 공공연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 흘러나왔다. 한꺼번에 수십 개의 법안을 밀어붙이다 보니 법안 내용도 숙지가 안 돼 민주당 쪽 설명을 듣고서야 쟁점을 알게 됐다는 의원들도 있었다. 한마디로 민주당은 한나라당이 선포한 ‘법안 전쟁’을 진짜 전쟁처럼 인식하고 대응했다. 하지만 정작 한나라당은 스스로 말해 놓고도 건성으로 행동했으니 잘될 리가 없었다. 한나라당이 이번 사태의 전말에 대한 처절한 반추와 자성을 하지 않는다면 다음 국회도 보나마나다.

김정하 정치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