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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모든 게 무뎌진 세상 … 그게 바로 한국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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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설정은 여기서 그치질 않는다. 자살한 건 아버지인데 자식들은 장례 치를 생각을 안 한다. 큰 아들은 영화 작업에 빠져 있고, 며느리는 술에 절어 새벽녁에 들어오며, 작은아들은 아버지 시신 밑에서 변기통을 붙잡고 볼 일 보기에 바쁘다. 세상에 이런 콩가루 집안이 있을까.

최근 TV·영화에서 활약 중인 장영남의 연기력은 놀랍다. 며느리로 분해 도저히 속을 헤아리기 힘든 여인상을 밀도있게 보여준다. 사진 왼쪽부터 장영남(며느리)·김동현(손님 남자)·이규회(시아버지)·김주완(둘째 아들). [극단 골목길 제공]


7일 개막한 연극 ‘너무 놀라지 마라’는 제목과 영 딴판이다. 장면 하나하나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언뜻 보아도 패륜이며 후안무치건만 자식들은 “너무 바쁘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반복한다. 희망을 선사해야 할 새해 초 아니던가. 이런 음습한 설정을 내던진 박근형 연출가의 꿍꿍이는 무엇일까.

#체면 따윈 내동댕이쳐라

박근형(46) 연출가는 1990년대 후반 이후 위기에 처한 한국 연극의 뿌리를 지켜온 자존심이라 평가받는다. 연극 ‘청춘예찬’에서 보여준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자화상은 기존 ‘리얼리즘 연극’과도 궤를 달리했다. 치밀하고 세세하기보단 날것 그대로의 꿈틀거림이 분출됐다. 정교함은 없지만, 생생함이 던져준 흡인력은 강력했다. 이후 ‘맨드라미꽃’ ‘선착장에서’ ‘경숙이, 경숙아버지’ 등에서 보여준 박근형식 리얼리즘은 낭만성이 거세된, 비틀려진 가족 관계가 화두였다.

신작 ‘너무 놀라지 마라’는 여기서 한참 더 나아갔다. 기존 작품처럼 2대에 걸친 가족에 포커스를 두지만, 마치 지금까진 습작이었다는 양 최극단을 향해 거칠게 내달린다. 김기덕 감독 영화를 보듯 누구 하나 정상적(?)인 사람이 없다.

무대는 아버지(이규회 분)의 자살로 문을 연다. 그 이유가 바람난 어머니 때문인 듯 보이나 확실하진 않다. 이건 서막에 불과하다. 시신은 그대로 방치된다. 대인기피증이 있는 둘째 아들(김주완)은 시신을 어떻게 할 엄두를 못 낸다. “썩은 송장 냄새가 진동한다”며 칭얼거릴 뿐이다. 이때 큰 며느리(장영남)가 집에 들어온다. 그녀는 동네 노래방 도우미다. “연말 연시가 대목”이라며 시아버지의 죽음을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는다. 오히려 시신 앞에서 술주정하듯 말을 내뱉는다. “아버님, 요샌 솔직한 새끼들이 없다니까요. 그냥 다이렉트로 ‘아줌마 나랑 한번 자자’ 이러면 얼마나 좋아. 그럼 나도 외로우니까 잠깐 망설이다 하룻밤 같이 몸 풀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러곤 시동생에게 쏘아붙인다. “이새끼 말하는 싸가지 봐라. 저 안에 있는 사람이 남이야? 너 낳아주고 길러주신 아버지잖아. 더러운 거 보기 싫으면 참고 사는거야.” 내면 깊이 꼭꼭 숨겨둔, 말초적 본능을 몽땅 끄집어낸 듯싶다. 여기서 주변에 대한 배려나 책임감 등을 거론하는 건 웃긴 얘기다.

#어설픈 희망을 거부한다

상황은 처절한데, 관객은 툭하면 웃는다. 너무나 뻔뻔한 자식들의 행동 때문이다. SF 영화를 찍다 잠깐 들어온 큰아들(김영필)은 “불효자 지금 왔습니다”며 목을 매는가 싶더니 “지금 정신없다. 감독은 이런 자잘한 일 하는거 아니야” 라는 한마디로 동생에게 떠넘기고 집을 나선다. 오랜만에 재회한 큰아들 부부가 서로를 위해주는 대목 역시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전형적인 블랙 코미디다.

점입가경, 며느리는 연하의 남자 손님(김동현)을 집까지 데려온다. 어색해야 할 남편, 시동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질펀하게 어울린다. 누군가 한 명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극은 마무리된다. 일상의 연속으로 마무리하던 이전 작품의 결말과도 확연히 다르다. 박근형 연출가는 “모든 게 무뎌진 세상, 극약처방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그의 눈에 비친 2009년 한국 사회는 이토록 절망적인 것일까. 아니면 극단의 밑바닥을 빠져 나오기 위한 역설적인 몸부림일까. 객석을 빠져 나오는 관객의 미소는 씁쓸했다.

2월 1일까지 산울림 소극장. 02-6012-2845.

최민우 기자

연출자 박근형씨 “오로지 나만 있는 사회 경각심 주려 파격 설정”

새해 벽두부터 작정한 듯 현대 사회의 치부를 파격적으로 드러낸 박근형 연출가는 “너무 놀라지 않는 게 문제다. 경각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왜 이런 극단적인 설정을 했는가.

“2009년 한국 사회를 보라.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아는가. 가족 간의 대화도 사라졌다. 아무도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다. 모든 게 무뎌졌다. 오직 ‘나’만 있을 뿐이다. 어떤 이념적 지향성보다도, 경제 한파보다도, 현재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위기는 붕괴된 공동체다.”

-심각한 내용이지만 관객은 많이 웃던데.

“직설 화법은 재미 없다. 정곡법보단 시치미를 뚝 뗀 채 에둘러 얘기하는 게 오히려 울림이 크다. 등장인물들은 겉으론 크게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불쑥불쑥 비춰지는 모습에서 기본적 상식 혹은 정서와 너무 동떨어진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을 뿐이다. 합리화라는 명목으로 이런 뻔뻔함을 저지르는 게 우리 모습 아닐까.”

-박근형식 리얼리즘의 변화인가.

“‘청춘예찬’ 이전 작품, 이를테면 ‘쥐’나 ‘만두’ 등에서도 극단적이고 엽기적인 설정과 묘사는 있었다. 내 작품의 뿌리는 본래 이런 처절함과 무관하지 않다. 앞으론? 모르겠다. 이번 작품의 반향이 나를 어딘가로 이끌 듯싶다.”

-‘너무 놀라지 마라’며 너무 놀래킨다.

“물론 반어법이다. 우린 요즘 별로 놀라지 않는다.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이 너무 많기 때문에 무감각해진 것일까. 놀람이 있어야 경각심이 일어나 반성이 있고 수정을 하는 것 아닐까. 작품은 ‘이래도 놀라지 않을래?’라는 물음이다.”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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