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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시평

민주주의와 그 적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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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2009년 1월 4일, 대한민국 국회는 공식적(?)으로 ‘통제 불능 상태’라고 선언됐다. 사실상 지난해 12월 18일부터 1월 6일까지 20일간 대한민국 국회는 그런 상태로 있었다. 국회의 리얼 버라이어티는 지상파 방송의 쇼를 애들 장난으로 만들었다. 수백 명의 패밀리가 뜨고, ‘1박 2일’ 팀도 혀를 내두를 기상천외한 생존 요령이 동원됐다. 압권은 ‘로텐더홀 미션’이다. 겨우 100여 명의 국회 경위가 300여 명의 농성자를 끌어내는 장면은 그야말로 ‘무한도전’이었다.

이렇게 정치는 ‘쇼’가 되었다. 그렇다. 국회는 쇼를 한 것이다. 프로레슬링은 ‘쇼’이기 때문에 비장한 얼굴, 불타는 복수심, 과장된 액션, 장외에서의 격돌, 환호와 야유, 그리고 무엇보다 흉포한 반칙이 동원된다. 진짜 격투기는 목숨을 걸고 싸우기 때문에 어떠한 반칙도 허용되지 않는다. 쇼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도 쇼가 아니다. 어떠한 반칙도 허용돼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를 쓰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절망적으로 물었지만 나는 ‘폭력에 굴한 이후에도 한국의 민주주의가 가능한가?’를 절망적으로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민주주의는 지고지순의 선도 아니고 완벽한 것도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는 좋은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것보다 덜 나쁜 것일 뿐이다.

인도의 네루처럼 ‘민주주의는 좋다. 나는 다른 제도들이 더 나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고 투박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영국의 처칠처럼 ‘민주주의는 지금까지 때때로 시행돼 온 다른 모든 형태의 정치 체제들을 제외하면 가장 나쁜 체제라고 한다’고 익살스럽게 표현한 사람도 있다. 결국 민주주의는 다른 정치 체제보다 아주 조금 나을 뿐인데 바로 그 조금은 폭력을 쓰지 않는 데 있는 것이다.

철학자 칼 포퍼도 그의 저서 『추측과 논박』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자이지만 그것은 다수가 옳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민주적인 전통이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 중에서 가장 악이 적은 전통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또 다른 명저인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나치와 마르크시즘의 광기와 폭력성을 비판했다. 이 책은 위대한 철학자들인 플라톤·헤겔·마르크스가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이분법적 역사관에 사로잡혀 전체주의의 기반인 ‘닫힌 사회’로 인도했다고 통렬히 비판했다. 이분법적 역사관은 필연적으로 포퓰리즘과 폭력을 동반하게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포퍼는 ‘열린 사회’에서는 혁명이나 폭력을 통하지 않고 논쟁을 통해 많은 중요한 문제에 관해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이번에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세 가지 폭력을 목격했다.

첫째, 물리적 폭력이다. 해머와 전기톱·소화기를 동원하고, 보이는 대로 부수고 때리는 모습을, 그리고 불법 점거와 농성을 시도 때도 없이 당연한 권리인 양 하는 폭력을 목도했다. 물리적 폭력은 야만적인 것이다. 폭력이 미화되면 우리는 사회에서 야만과 싸울 수 없다.

둘째, 제도의 폭력이다. 12월 18일 외통위 문이 잠길 때, 그것은 민주주의의 문을 닫은 것이다. 재판정에 변호사를 못 들어오게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다수결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충분한 토론’을 거쳐야만 한다. 헌법재판소나 대법원도 마지막에는 다수결로 결정하지만 사람들이 그 결정을 존중하는 이유는 충분히 토론한 후에 내린 결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셋째, 언어의 폭력이다. 사람이 말을 타락시키지만 말도 사람을 타락시킨다. 민주주의 힘은 말에서 나온다. 사람의 말이 그 사람의 인격을 보여주듯 정치인의 말은 민주주의의 수준을 보여준다. 분노와 증오, 경멸의 말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폭력에 저항한 역사다. 민주주의는 폭력을 수단으로 갖지 않는다. 폭력은 민주주의의 친구가 아니라 적이다. 폭력으로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더욱 믿지 않는다. 폭력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은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폭력을 적으로 두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제도라는 훨씬 위대한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다.

박성민 정치컨설팅 ‘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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