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IAEA사무총장 자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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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 정부의 외교가 예상치 않은 일로 시험대에 올랐다.국제원자력기구(IAEA)사무총장 자리를 놓고 정근모(鄭根模)전과기처장관을 후보로 지명할 것인가를 놓고 고심하고 있는 것이다.

11월말 임기만료되는 한스 블릭스 사무총장이 연임을 포기한 마당에 총장 자리를 메우기 위한 1차 후보등록이 지난해 12월15일이었고 후보등록이 없어 지난해말까지 2차 등록을 받았다.당시 우리 정부는 후보등록을 하지 않았다.미국이 난색을 보인다는 것이 우리 외무부가 차마 인정하기 어려운 이유다.물론 국제원자력계의 분위기와는 별개로 표를 가진 각국 정부의 지지가 낮다는 표분석이 외무부의 공식적인 후보지명 주저의 이유다.

지난해 9월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북한달래기에 미국과 함께 나섰던 우리 정부는 미국의 어정쩡한 태도를 우리의 후보지명 반대로 읽었던 모양이다.그러나 몇달사이 상황은 변했다.2차등록을 마친 후보 어느 누구도 회원국 3분의2 득표에 못미쳐 IAEA는 5월5일까지 다시 후보등록을 받고 있다.와중에 국내 과학기술계 뿐 아니라 적십자사등 사회단체들이 鄭후보 지명을 정부에 촉구하고 나섰다.

그런데 우리 정부가 미적거리는 가운데 아프리카의 카메룬이 鄭후보를 지명하고 나섰다.정부가 당혹할 일이다.한국 정부가 추천하지 않은 후보를 제3국이 추천하는 예기치 않은 상황은 IAEA로서도 분명 익숙지 않은 경우다.

국제원자력계에 널리 알려진 鄭후보는 어찌보면 이미 한국을 대표하는 후보가 아닐지 모른다.현재까지 공식.비공식으로 鄭후보를 지지하고 나선 국가들이나 자국정부의 입장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각국의 원자력계가 한국 정부의 후보 이상으로 鄭후보를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가 신경써온 미국의 공식입장은“후보등록 마감후 인물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최종입장을 정하겠다”는 것이다.당연한 일이다.다만 우리 외무부가 나름대로의 정보수집 결과 미국측 입장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사태를 단선적으로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후보가 나서지 않고 가능하면 정치적 잡음없이 회원국들의 공감대에 기초한 사무총장 선출을 매듭짓고 싶은 미국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다.그러나 우리 정부는 鄭전장관을 원자력협력대사라는 자리까지 만들어 IAEA와의 협력창구로 임명했고,지난해 8월까지만 해도 사무총장 경선에 내놓겠다는 입장을 갖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제3국이 한국인 후보를 천거한 사실에 곤혹스러워할지 몰라도 우리가 지난 1,2차등록 당시 후보지명을 하지 않은 것으로 미국에 대한 성의표시는 했다고 볼 수 있다.이젠 정부가 당당히 나서 우리 후보의 공식등록을 지원한다 해서 이를 문제삼을 국가는 없다해도 과언은 아니라는게 워싱턴내 원자력계 인사들의 견해다.

더욱이 미국 정부가 이집트 출신 후보를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공공연히 알려진 마당인지라 미국 원자력계의 지지를 받고 있는 鄭후보가 나서는데 미국 정부가 부담느낄 이유도 없어진 셈이다.

영국.프랑스 등 유럽의 핵국가들과 러시아및 중국도 우리 후보를 지지 혹은 반대하지 않는다는 분위기다.아프리카표에 의지하는 이집트후보에 대한 지지표도 카메룬이 鄭후보를 천거함으로써 분열조짐을 보이고 있는 마당이다.

게다가 무시못할 것은 미국 의회내 전.현직 중진의원들 상당수가 한국의 鄭후보를 지지하며 미국 정부를 상대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는 사실이다.이들은 이집트 출신 후보보다 鄭후보가 미국익에 합당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 정부가 국제사회의 돌아가는 모습을 폭넓게 파악하지 못하고 미국 입장에만 귀를 기울였다면 전례에 비춰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그러나 이젠 이러저런 이유를 들먹이며 체면차리는데 급급하기 보다 한때 정부가 세계화를 앞세우며 국제사회로의 진출을 강조했던 정신으로 돌아가 한국인 후보를 국제기구의 떳떳한 자리로 보내는데 힘을 모으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길정우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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