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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대 오른 김현철씨의 인생역정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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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소산 (小山),정계의 황태자,부통령,소(小)통령,리틀 YS,보이지 않는 실세,소장(所長),문민 황태자….김현철(金賢哲)씨에 대한 세간의 호칭은 이렇듯 다양하다.

'59년 서울출생,중대부중,경복고,한성대 입학-고려대 사학과 편입.졸업,미국 남가주대 경영학석사,고려대경영학박사,2남1녀의 아버지,대통령의 2남3녀중 넷째…'현철씨의 약력이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경력에도 불구하고'부통령.황태자'등으로 불린 것은'대통령의 차남'이라는 점과 그를 배경으로 한 막강한 세도행각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런 관직이 없으면서 한시대에 한나라를 멋대로 주무른 전횡은 청문회 증인석으로 귀결됐다.청문회 직후 검찰에 재소환되는 그는 검찰의 서슬과 들끓는 여론에 미루어 어쩌면 수인(囚人)번호까지 부여받을지 모를 운명에 직면해 있다. 만38세의 현철씨는 97년 오늘 한국사회를 뒤흔드는 태풍의 핵에 자리잡고 있지만 그의 유년시절은 유별난게 없었다고 한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때는 성적이 상위권이었다.중대부중시절에는 반장도 했다.초등학교 친구들은 그를“남을 잘 웃기고 활달한 성격”으로 기억한다.

가정에서는 편애(偏愛)소문이 나돌 정도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자신을 빼닮은 현철씨를 특히 아꼈다고 한다.어머니 손명순(孫命順)씨가 몸이 허약하고 심약한 장남 은철(恩哲)씨를 챙긴 것도 이런데서 기인한다는 얘기도 있다.이런 현철씨는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아버지의 정치 행로와 운명을 같이하게 된다.5공화국이 출범하고 야당 정치인인 YS가 가택연금 당할 때의 경복고 시절이 대표적이다.

이때 부터 상위권을 유지하던 성적이 뚝 떨어졌다.대신 일간신문의 정치면을 섭렵하고 친구들에게 정치상황을 설명하는등 정치에 관심을 보인다.한 고교동창은“신문에 나지 않은 정치권의 속사정을 들려줬는데 나름대로 상당히 예리한 분석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며“당시 아버지같은 정치인이 되는게 꿈이라고도 했다”고 기억했다. 그의 성격도 아버지를 닮아 승부 근성이 뛰어나고 저돌적이며 불같은 기질을 보였다.또 운동을 좋아해 야구.축구.씨름등에 소질을 보였는데'지기 싫어하는 자존심이 강한 학생'이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고3 성적은 부진했다.한성대를 1년여 다닌뒤 고려대 사학과에 편입학한다.그가 사회에 진출한후 박태중(朴泰重)씨등 중학동창들을 가까이 한 것도 기억하기 싫은 고교시절 때문이었다는 얘기가 있다.

87년 미국 남가주대를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직장생활을 해보려 노력했다.이리저리 입사원서를 냈지만 번번이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했다.어렵사리 쌍용증권에 입사했지만 정상적인 회사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야당정치인 아버지를 둔 현철씨 때문에 회사가 어려워질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현철씨는 87년 아버지의 대통령 선거운동을 돕겠다며 정치 일선에 뛰어들게 됐고 그것이 오늘의 비극적 운명을 만드는 단초가 됐다.

1盧3金이 맞붙은 13대 대선때만 해도 그의 역할은 소형승합차를 타고 유세장을 다니며 친구들과 선거 홍보물을 배포하는등 단순한 활동에 머물렀다.당시 함께 했던 인물이 박태중씨다.대선 패배후 현철씨는 선거 캠프에 참여했던 경험을 살려 88년1월 여론조사기관인 중앙조사연구소를 설립,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한다.

현철씨는 이 연구소의 조사결과등을 바탕으로 金대통령에게 여러가지 조언을 하며'정치참모'로서의 자리를 굳히게 된다.

그 와중에 민주계 내부의 견제도 상당했다.홍인길(洪仁吉)전총무수석등은“얼라(어린이의 경상도 사투리)가 뭘 알아”라고 꼬집기도 했다.

그는 14대 대선전 YS의 대통령 후보 따내기에 상당한 활약을 펼쳤다.현철씨는 노태우(盧泰愚)대통령 주변인사를 친인척.정계.관계.군.TK원로등으로 분류하고 이들을 다시 최측근,측근,영향력 행사등의 등급별로 분류해 접촉의 수와 강도등을 조절하는 치밀함을 보였다.金대통령 측근들은 현철씨를 못마땅해 했지만 이미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수준으로 커져버렸다.

이같은'축적'을 바탕으로 14대 대선때는 13대때와 달리 나사본과 개인 조직등을 통해 맹활약한다.조직 계통상으로는 나사본 산하단체로 분류됐지만 실제로는 별도의 활동을 한 청년본부를 이끌었고 이 청년본부는 현철씨 또래 내지 후배등 '젊은 친구'들이 대거 포진해 전국적인 득표작업을 벌였다.이때 이미 최형우(崔炯佑).서석재(徐錫宰).김덕룡(金德龍)씨등 金대통령의 핵심참모들과 대등한 발언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金대통령 당선과 함께 모든게 달라졌다.金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가면서 민주계 실세들도 金대통령을 만나기 어렵게 됐다.그런만큼 수시로 청와대를 드나들며 대통령을 단독 면담할 수 있었던 현철씨의 독보적인 위치는 그의 어깨에 날개를 달게 했다.정.관.재계인사들이 그를'알현'하기 위해 늘어섰다.

金대통령 은“기관 정보에 의존하면 안된다.왜곡이 많다.문민대통령답게 바깥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그래서 金대통령은 민심을 들어오는 역할을 현철씨에게 부여했다.현철씨를 비판하는 소리는 차단되게 마련이었고 金대통령 일부 측근들의 현철씨에 대한 고언은 매도되기 십상이었다.청와대출입기자들이 현철씨 문제를 꺼내면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낼 정도였으니 대통령의 눈치를 봐야하는 인사들이 어떠했으리란 것은 상상이 간다.따지고 보면 현철씨의 오늘은 본인과 YS의 업보다.

공조직보다 사조직에 의존한 야당정치인 출신 YS가 대통령이 돼서도 아들의 참모역을 말리기보다는 오히려 의존했다는 점과 정치에 조기 입문한 현철씨의 이력이 그것이다.YS는 수십년 야당생활동안 자식들을 보통사람처럼 키우지 못한데 대해 미안해 했고 아들한테는 늘 약한 모습을 보였다.현 정부 출범후 수차례에 걸쳐“현철이를 외국으로 내보내라”는 주변의 건의를 떨치지 못한 것도 이때문이다.

현철씨는 현 정부 출범후 자신을 둘러싼 세간의 의혹이 증폭되자“나는 머리에 뿔 달린 도깨비가 아니다”고 항변한 적이 있다.하지만 오늘날 대통령의 아들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은 그의'뿔'에 주목하고 있다.도깨비의 뿔이건,못된 송아지의 뿔이건. 〈박승희 기자〉

<사진설명>

3父子 95년 추석때 아버지 김영삼 대통령.형 은철씨와 함께 경남거제군장목면외포리 선영에 성묘하러 갔던 현철씨.金대통령은 자신의 모습과 성격을 빼닮은 현철씨를 특히 아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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