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시신이 화장실에 있는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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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호 10면

연극 ‘너무 놀라지 마라’
1월 7일(수)~2월 1일(일) 산울림소극장
평일 오후 8시, 토 오후 4시·7시
일 오후 4시(화 쉼, 1월 26~27일 쉼)
문의 02-6012-2845

이 상큼한 구어체 제목이 유언장 내용이라니. 깔끔하게 양복 매무새 갖춰 입으며 아버지(이규회)가 말씀하셨다. “나 죽으면 유서 없다. 형한테 너무 놀라지 마라고 전해라.” 그리고 닫히는 화장실 문. 둘째 아들(김주완)이 그 문을 열자 천장에 목맨 아버지 시체가 보인다. 놀라지도 않고, 둘째는 문을 닫는다. 숙취에 헤매며 잠이 깬 형수(장영남)도, 간만에 집에 들어온 형(김영필)도 놀라는 법이 없다. 장례를 치르기는커녕 시신을 내려놓을 생각도 않는다. 이 기막힌 동거에 너무 놀라지 마라.

연극 ‘청춘예찬’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 등 부조리한 현실 풍자로 대학로를 달궈온 연출가 박근형이 신작 ‘너무 놀라지 마라’를 선보인다. 산울림 소극장이 지난해 한국 신연극 100년을 맞아 기획한 ‘연극 연출가 대행진’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이다.

개막 직전까지 대본을 마치지 않기로 ‘악명 높은’ 박 연출이 웬일로 일찌감치(개막 2주 전) 대본을 털었다. 그래도 연습하며 굵직굵직 다듬어 가는 거야 늘 하던 대로다. 심지어 아버지에 이어 등장인물 중 한 명이 죽게 되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죽을지는 이제 구상 중이란다.

고교 졸업 이후 집 밖을 나가본 적 없는 은둔형 외톨이 둘째와 생활고를 덜기 위해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는 형수, 그리고 불황기에 SF 대작을 꿈꾸는 영화감독 형. 구성만으론 음습할 법하나 환상과 현실을 절묘하게 섞은 연출은 곳곳에서 웃음을 자아낸다. 특히 목맨 채 매달려 있는 아버지는 줄곧 관객을 향해 부릅뜬 눈으로 “나 좀 내려주라”고 외친다.

이 환청을 듣는 둥 마는 둥 가족은 제 살기 바쁘다. 화장실 쓰기 불편하다는 시동생의 말에 형수는 “더러운 꼴 보기 싫어도 그냥 사는 거야. 버티는 거야”라며 윽박지른다. 영화 일정 때문에 바쁘다는 형은 “장례가 문제냐. 영화 잘되면 차라리 새집을 사줄게”라며 다독인다.

가족 구성원 하나하나에 초점을 맞추면, 더럽고 징해도 하는 수 없이 살아야 하는 소시민 얘기다. 아버지 시체가 매달려 있어도 똥은 싸야 하고, 돈은 벌어야 한다. ‘관계’에 초점을 맞추면, 일그러진 현대 가족의 자화상이다. 도박 빚을 남기고 집 나간 어머니, 껌처럼 들러붙어 기생하는 시동생, 아내가 알코올 중독이 돼버린 것도 모르는 남편이 차례로 ‘폭로’된다.

최종적으로 작품이 고발하는 것은 ‘놀라지 않는’ 현대 사회 자체다. 슬픔과 놀라움이 사치라도 되는 양 현대의 개인들은 타인에게 감응하지 못한다. 사회 부적응자인 둘째가 적응해야 하는 현실이란 이렇듯 타인의 고통과 관계없이 쳇바퀴 도는 일상이다.
지난해 12월 31일, 연출가와 배우들은 극장 근처 민속주점에서 새해를 맞았다.

옆자리 여기저기서 자정맞이 카운트다운이 터져나올 때 박 연출이 취기를 띠고 말했다. “배우 기주봉 형님이 말이야, 산엘 갔는데 ‘입산금지’라며 관리인이 막더래. 앞으로 가지 말라고. 그랬더니 그 양반이, 어떻게 한 줄 알아? 뒤로 걸어 들어갔어.”

왁자한 웃음 뒤에 덧붙였다. “앞으로 못 갈 땐 뒷걸음질해서라도 가야 한다. 또 다들 앞으로 외칠 때 뒤로 갈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게 배우다.
연극 ‘너무 놀라지 마라’는 2009년 소의 해에 선보이는 박근형표 뒷걸음질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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