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국회의장에 치여 … 172석 한나라의 굴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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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1년 전인 2008년 1월 1일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한나라당 신년인사회에 참석했다. 이 당선인은 “10년간 지친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당이 되자”며 “열린 마음과 밝은 표정으로 5년 후에 한 번 더 (집권당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사람들은 환호했다.

1년 만에 한나라당의 분위기는 180도 달라졌다. 국회는 꽁꽁 묶인 채 묵은 해의 숙제를 새해에도 잔뜩 쌓아놓고 있다. 지난해 4월 총선 결과 172석의 절대 다수당으로 재탄생한 한나라당에서 여당의 무게감은 없어졌고 “공룡 여당”(전여옥 의원)이라는 소리가 나올 만큼 무기력하다.

한나라당이 원내 1당을 차지한 18대 국회의 입법 성적표부터가 초라하다. 국회에 제출된 3267건의 법률안 중 2일 현재 원안대로 통과된 건 168건에 불과하다. 경제 살리기라는 대선 구호가 무색하게 국회 내 주요 경제 상임위의 입법 통계도 내세울 게 없다. 정무위는 184건 중 9건, 기획재정위는 294건 중 22건, 지식경제위는 193건 중 16건만 원안대로 처리됐을 뿐이다.

연말 쟁점 법안을 다루는 솜씨도 투박하다. 지난해 12월 21일 한나라당은 “어려운 경제 여건을 극복하기 위해 연내에 반드시 처리하겠다”며 114개의 법안 리스트를 발표했다. 하지만 1주일 만인 28일 중점 처리 법안을 추리며 85개로 줄였다. 그나마 “사회개혁법안 13개의 연내 처리를 고집하지 않겠다”며 목표를 72개로 낮췄다.

후퇴는 계속됐다. 김형오 국회의장의 예상치 못한 반발에 직면하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동의안, 미디어 관련 법안, 금산 분리 완화 관련 법 등 주요 법안을 ‘2월에 협의(또는 합의) 처리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가 협상안까지 나왔다.

2일 오후 박희태 대표가 소집한 최고위원 간담회에선 이 협상안에 대해 “백기 투항 아니냐” “야당과 최대한 합의 처리하겠다는 건 결국 안 하겠다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한나라당 의원들의 좌절감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비례대표 의원 22명은 이날 “김 의장은 국회 질서유지를 위해 모든 권한을 지체 없이 행사해야 한다”며 “한나라당 지도부도 경제 살리기 법안 및 개혁법안을 조속히 처리할 것을 건의한다”는 집단 성명을 냈다. 지도부 책임론 같은 입법 전쟁의 후유증을 예고하는 목소리도 물밑에서 오갔다. 당직을 맡고 있는 한 초선의원은 “여권의 실력이 이것밖에 안 된다고 비쳐지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걱정했다.

박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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