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세상보기>리스트 증후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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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요즘 한국인들이 앓고 있는 리스트(list) 증후군은 엄격히 말해 소환자(召喚者) 증후군과 시청자 증후군이 합친 병이다.증후군은 몇가지 증후가 늘 함께 인정되나 그 원인이 불명할 때 부르는 병명.한국인은 이미 이 병을 여러 번 앓

은 적이 있지만 작금의 병은 골수에까지 미친 것 같다.그 증세를 보자.

먼저 소환자 증후군.태연자약하게 소환자가 검찰청에 들어선다.먼저 나타나는 증세가 포토(photo)라인 혐오증.애써 빙글거리는 낯을 짓지만 속으론 이 몇 발자국,이 몇 십초를 어떻게 모면하나 걱정이 태산같다.아 멀고도 긴 원한의 포토라인이여,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린다.걱정대로 무례한 질문이 나온다.“돈 받았어요?”“안 받았습니다.”“정말 안 받았어요?”“정말은….”

여기서 다음번 증세'문지방 앞에서의 거짓말'이 나타난다.“내가 돈을 받았다고,천만의 말씀,절대 사실무근,만난 적도 없는데,나같은 사람에게도 돈을 줍니까.” 물론 조사실을 다녀 나오면 말이 달라진다.“내가 아니라 측근이 받은 것 같아요,생각해보니 딴 명목으로 받은 것 같아.”

문지방 앞 거짓말의 그랑프리가 탄생한 것은 바로 이때다.“내가 정태수 돈을 안 받았다고 했지 언제 한보 돈을 안 받았다고 했나.” 그랑프리 다음가는 우수상도 나왔다.“잠결에 사과궤짝을 받아 형님에게 주었는데 그 속에 2억원이 들었는줄 누가 알았능감?”이때의 전달자는 맛좋은 사과니 꼭 혼자서 드시라는 부탁을 안 했던 모양이다.

소환자 증후군 가운데'리스트 일별(一瞥)공포증'도 있다.조사실에서 리스트를 본 사람은 가슴이 철썩 내려앉고 눈 앞이 아득해지는 증세다.입법부의 수장(首長),전 경제팀장,킹 메이커,대선 주자,여권 실세,야권 실세등.큰소리깨나 치는 인물들은 거의 다 망라돼 있다.“더 보여 드릴까요.”“아니 됐습니다,더 보면 기절할 것 같아요,제발 그 명단을 치워주십시오.묵시록(默示錄)의 네 기사 가운데 가장 몰골이 흉측하다는 유혈과 주검의 기사를 봤어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겁니다.”

시청자 증후군은 소환자 증후군과는 병세가 약간 다르다.우선 리스트 조사와 국회특위 청문회를 혼동한다.그래서 이런 질문을 한다.

“정치인이 돈을 받을 때 조건 있는 돈은 받지 말라,받은 돈의 조건에 얽매이지 말라,받았으면 혼자 쓰지 말고 나눠 쓰라는 명언이 나온 곳이 리스트 조사실인가요,청문회장인가요?”“….”“방귀 뀐 놈이 성을 낸 곳이 검찰 조사실인가요,

청문회장인가요?”“….”

또 하나의 증세는 거액대출의 배후 몸통이 누굴까 궁금해 하는 안달증.줄줄이 소환되는 정치권 인사들이 배후 몸통이 아닌 것은 분명한데 왜 초점이 이들에게 모아지는지 알다가도 모른다는 것이 이 증세의 특징이다.

시청자의 마지막 증세는 리스트 작성 욕구증.리스트에 적히느냐,리스트를 작성하느냐의 기로에서 방황하다가 스스로 리스트를 만들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것이 이 증세의 특징이다.그래서 시청자가 작성하는 리스트를 잠깐 살펴봤다. 첫째,지구를 떠나야 할 사람.둘째,우리 곁에서 격리시켜야 할 사람.셋째,낚시질을 가야 할 사람.

김성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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