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칼럼>황장엽은 트로이 목마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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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북한의 황장엽(黃長燁)노동당 비서가 곧 서울로 온다.그의 망명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그를 어떤 입장에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그는 영웅인가,배신자인가,아니면 단순한 귀순자인가.

세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하나는 주체사상의 대부였던 그의 망명은 북한 주체사상의 붕괴고 남(南)의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라고 보는 입장이다.사상과 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살아 있는 본보기라고 볼 수 있다.이는 곧 북(北)의 체제 붕괴가 가까워왔음을 알리는 낙관적 신호며 조금만 밀어붙이면 통일은 곧 올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주기도 한다.또 그는 평생 북한 요직을 맡으며 북한 심층부(深層部) 구조에 익숙해 있어 그의 정보량은 다른 어떤 정보보다 신빙성과 깊이를 더해준다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정반대의 관점도 가능하다.나치 독일의 헤스라고 볼 수도 있다는 자민련의 우려 섞인 시각이다.루돌프 헤스는 나치 독일의 2인자였다.2차대전이 한창이던 때 그는 스코틀랜드로 망명했다.독일의 소련침공에 따른 영국의 반발을 무마하면서 영국과 독일이 세계를 양분하자는 비밀협상안을 휴대했으리란 설도 나돌았다.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종신형을 받고 숨질 때까지 그는 히틀러를 한번도 부정한 적이 없는 충실한 추종자였다.黃도 헤스일 수 있다는 가정 아래 자민련은“黃비서의 귀

국을 환대해선 안되며 그의 진실한 참회를 듣고 그가 제공한 정보의 질을 판단한뒤 적절한 수준에서 대우해야 한다”고 지침을 마련했다.

여기서 제3의 관점이 가능하다.황장엽은 트로이 목마가 될 수 있다는 관점이다.난공불락(難攻不落)의 트로이성을 함락하기 위해 오디세우스는 거대한 목마를 만들어 그 속에 정예부대를 싣고 침투해 성을 무너뜨린다.黃비서가 트로이 목마일

수 있는가.헤스처럼 어떤 목적을 띤 망명이라고 보는 경우,또는 黃비서의 망명 진의와 상관없이 우리 정부가 그를 목마로 이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黃비서가 전한 서신에 따르면 지금 북은 전쟁준비에 광분하고 있고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조국을 구하기 위해 그는 남행을 결행했다고 망명동기를 밝히고 있다.진정 그렇다면 아쉬움이 남는다.왜 그같은 사람이 북에 남아 전쟁도발을 억지하면서 남북한간 유연한 관계를 조성하는데 적극 기여하지 못했을까.물론 그런 역할을 할 수 없을 만큼 궁지에 몰려 망명을 선택했을 것이다.그러나 숙청을 당할 궁지에 몰렸다 해도 그를 존경하고 그의 생각과 뜻에 동조하는 세력이 많다면 숙청

그 자체가 지니는 의미도 컸을 것이다.왜 구태여 숙청보다 더 위태로운 망명을 했을까 하는 의문을 나 자신은 잘 풀 수가 없다.

또한 그의 서울도착과 함께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사항이 이른바 황장엽리스트다.있다,없다,이미 내사를 마쳤다는 설이 돌고 있지만 지난 경험으로 봐선 대선과 맞물려 있는 지금 시점에서 실체와 관계없이 황장엽리스트가 나돌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먼 과거가 아닌 지난 5년간의 경험속에서 선거와 우리의 대북정책이 어떤 함수관계를 지녔는지 일별해 보자.남북기본합의서 채택으로 화해무드가 조성되고 남북정상회담이 이슈화됐던 92년 3월24일 14대총선에선 여소야대로 여당이 참패했다.92년 대선 직전 이선실.김낙중등 간첩단이 정치권과 재야를 상대로 공작을 벌였던 남한조선노동당사건이 터지자 YS 당선에 크게 기여하는 결과가 됐다.'사서라도 쌀을 지원하겠다'는 대북협상 바람이 불자 95년 지차체선거는 여당에 치명타를 입혔고 북한이 비무장지대에서 무력시위를 하자 신한국당엔 뜻밖의 승리를 안겨줬다.대북관계가 유화국면이면 야당이 유리하고 긴장관계면 여당이 유리하다는 간단한 공식이 나온다.대선을 앞둔 지금 정부 여당은 어떤 대북정책을 쓸 것인가.여기서 황장엽리스트가 어떤 형태로든 나올 수밖에 없다는 짐작을 하게 된다.

나는 결코 黃비서 망명을 과소평가하거나 의혹의 눈초리로 봐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게 아니다.목숨 건 그의 망명이 헛되이 끝나지 않고 통일로 가는 긍정적 기여가 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안고 있다.그렇게 되기 위해선 黃비서 망명을 대북 자극용이나 대선 바람용으로 써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북에서 보낸 트로이 목마여도 안되고 남에서 만들어내는 목마여도 안된다는 생각이다.따라서 黃비서 망명은 영웅도,배신자도,단순한 귀순자도 아닌 분단한국이 만들어낸 비극의 하나라고 보는 관점이 아직은 가장 정확한 판단이라고 본다. 권영빈 (논설위원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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