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으로가는간이역>21. 인천역 (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시를 남북으로 나누며 달리는 철도는 항만의 끝에 이르러서야 잘려졌다.석탄을 싣고 온 화차(貨車)는 자칫 바다에 빠뜨릴 듯한 머리를 위태롭게 사리며 깜짝 놀라 멎고 그 서슬에 밑구멍으로 주르르 석탄가루를 흘려보냈다.'-오정희'중국인

거리'에서

플랫폼을 걸어 나오면서 철길이 잘린 것을 보고 종착역이라는 것을 실감했다.역광장으로 나왔을 땐 혹 잘못 내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역사를 다시 바라봤다.'인천역'.분명했다.4대도시의 역사치곤 시골 역사 만큼 작고 낡았다.의외였

다.

“40여년전에 지어진 역사가 지금까지 그대로지요.앞으로도 역세권이 발전할 가능성은 없기 때문에 이 모습 그대로 오랫동안 있을 것 같아요.” 인천 토박이로 32년째 철도공무원으로 있는 역무계장 이은성(55)씨의 말이다.

1900년에 생겼으니 1백년 가까이 된 역이다.하지만 6.25로 역사는 사라지고 60년에 다시 세워졌다.토요일 오후.광장은 붐볐다.대부분 월미도로 떠나는 젊은 연인들이었다.바다를 보기 위해 연인들은 역광장에서 월미도행 시내버스를

탔다.

본래 역 근처에는 선창가가 있었다.하지만 선창은 오래전 연안부두로 옮겨갔다.부둣가를 따라 상점도,술집도,사람들도 떠났다.신도시 열풍까지 불어 옛 시가지인 인천역 주변은 더욱 여위어 갈 뿐이었다.광장 앞 길건너에는 중국인거리가 있다

.

“해안촌(海岸村) 혹은 중국인거리라고 불리는 우리 동네는 겨우내 북풍이 실어나르는 탄가루로 그늘지고,거무죽죽한 공기속에 해는 낮달처럼 희미하게 걸려있었다.”

50년대 중국인거리를 그린 단편소설'중국인거리'에서는 지금의 차이나타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고종 19년인 1882년 청국과의 통상조약이 체결되고'청국전관지계'로 설정되면서 형성된 거리다.한때 청요리점.잡화상점들로 흥청댔고 화교

만도 1만여명이나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1백50여가구에 6백여명만 남아있다.중국음식점이라곤 네댓개뿐.그나마 탄가루인지를 뒤짚어 쓴 거무튀튀한 거리에서 쓸쓸하게 서있었다.근처에 싸구려 여인숙과 밴댕이 횟집이 눈에 띄었다.선창가를 따라

미처 떠나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의 숙소며 선술집이었다.

중국인거리 위 응봉산 기슭에 자유공원이 있다.공원 팔각정에 서면 월미도와 인천항이,그리고 주저앉을 것만 같은 인천역사가 보인다.자유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으로 본래 이름은 만국공원.공원 주변에 일본.미국.독일.중국등의

조계(租界)가 있었다.지금도 당시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어 이따금 영화촬영의 무대가 되고 있다.

공원 한가운데 서있는 맥아더장군 동상과 한.미수교 1백주년 기념탑에서 항구의 역사를 더듬어볼 수 있었다.

인천역사는 응봉산 아래에서 열차가 설 때마다 승객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1백년전부터 이 역을 드나들었을 조상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이 역을 통해 상하이(上海)나 하와이등지로 떠났던 망명객들이 환국한 역광장에 서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오랫동안 끊어졌던 중국행 여객선은 역 근처 국제여객선터미널에서 다시

출항하고 있었다.

평일엔 1만5천여 여객들이 드나드는 역이지만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이면 3만여명으로 늘어난다.그러나 바다를 보기 위해 내린 연인들로 붐비는 인천역사의 토요일 오후는 세월에 닳아빠진 음산한 주위 풍경에 눌려 스산하게 보였다.

개항의 역사,전쟁의 상흔,경제개발의 부침을 지켜보았을 인천역.역 광장엔 한 스님이 심었다는 수령 80년된 은행나무 한그루가 서 있었다.

은행나무 아래서 젊은 연인들의 웃음이 봄바람을 타고 터져 나왔다.그 웃음 속에 기차는 다시 서울로 떠나고 있었다.언제나 그렇듯 종착역은 또 시발역이기도 했다. 〈인천=이순남 기자〉

<사진설명>

세워진지 40년 가까이 된 경인선의 종착역인 인천역사.주말 월미도를 찾는 관광객들이 역 광장에서 시내버스를 기다리고 있다.대도시의 역사치고는 낡고 비좁지만 세월의'항기'는 그만큼 짙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