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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힘을 모을 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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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매일 아침 같은 해가 뜨지만 오늘의 태양은 다른 태양이다. 붉은 해는 우리에게 외친다. “정신을 바짝 차려.” 2009년은 비상(非常)의 해다. 1년 전 우리는 건국 60주년의 뜨거운 기운에 싸여 있었다. 새 지도자가 국민적 기상(氣像)의 선두에 섰다. 그러나 1년이 안 돼 모든 게 꺾였다. 혹독한 경제위기가 닥친 것이다. 1950년대 한국전쟁 이래 최대의 위기다. 과거에도 위기는 있었다. 60~70년대엔 안보·경제 비상사태가 있었고 80년엔 나라의 권력이 텅 비었으며 98년엔 외환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모두 제한적이거나 일시적이었다. 작금의 위기는 다르다. 전 세계적이며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한국인 혼자 헤쳐 나간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 더욱 불안하고 긴장된다.

대통령 중심의 리더십 갖춰야

2009년 한국은 다섯 가지 고통에 신음할 것이다. 저성장·수출 감소·도산·실업·가계 위축이다. 많은 선진국처럼 한국도 마이너스 성장을 피해갈 수 없을지 모른다. 한국의 수출 시장인 미국·유럽·중국·일본의 경제가 쪼그라들고 있다. 지난해의 암울한 경기지표들은 예고편에 불과하다. 올해 초부터 쓰러지는 기업이 속출할 것이다. 근로자가 직장을 잃고 자영업이 문을 닫으면서 실업률은 높아질 것이다. 국가가 쪼그라들면 가계도 줄어든다. 많은 이가 중산층에서 서민, 서민에서 빈민으로 미끄러질 것이다.

산더미 같은 파도가 빠른 속도로 밀려오고 있다. 자,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왕좌왕하면서 시련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것인가. 아니면 비장한 각오로 구난(救難)의 로프를 잡을 것인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우리의 선조는 서독에 광원과 간호사로 갔다. 꽃 같은 젊은 목숨들이 베트남 전장으로 달려갔다. 70년대 오일쇼크 땐 근로자들이 열사(熱沙)의 땅으로 갔다. 98년 외환위기가 터지자 한국인은 결혼반지까지 내다 팔아 금을 모았다. 역경의 20세기 드라마였다. 위기의 21세기에 14세기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이순신 장군은 걱정하는 왕에게 “아직 배가 12척이나 남았다(尙有十二)”고 했다. 2009년, 대한민국의 12척은 어디에 있는가.

배려와 협력의 생존 지혜 필요

위기 극복의 기함(旗艦)은 리더십이다. 국가의 리더십은 대통령을 중심으로 청와대·내각·여당, 그리고 야당으로 구성된다. 선진국은 오바마·후진타오·사르코지를 중심으로 뭉치는데 한국은 리더십이 요동치고 있다. 일을 해야 경제도 살리고 위기도 이겨낸다. 정부가 일을 하려면 국회가 도구를 만들어줘야 한다. 그런데 국회는 도구 창고를 걸어 잠그고 의회민주주의를 패대기쳤다. 거대 여당은 지도력 빈곤으로 허수아비가 됐고 야당은 해머 투쟁 자해(自害) 세력으로 남아 있다. 대통령은 도구를 챙겨주면 일을 열심히 해보겠다고 한다. 국민은 압도적 지지로 그를 지도자로 뽑았다. 국민은 그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민주당은 대선·총선에서 졌다. 여기에 숨어 있는 국민의 뜻을 헤아려야 한다. 싸우다가도 강도가 들어오면 가족은 뭉친다. 여야는 올 한 해만이라도 정쟁을 접고 닥쳐오는 초비상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

정부와 국민은 마음을 다잡고 할 일을 해나가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경제위기 관리다. 한국 사회는 먼저 최악의 수개월을 버텨내고, 고통을 최소화하며, 장기적인 회복책을 강구해야 한다. 정부는 방향타를 잡고 있다. 움츠러들어선 안 되며 과감해야 한다. 재정·감세·규제완화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생존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 과감하되 현명한 게 중요하다. 정책은 소비 유발과 일자리 창출, 그리고 사회안전망 확충에 효율적이어야 한다. 아울러 민간 경제구조를 효과적으로 개혁해 오늘의 위기를 내일의 기회로 삼는 게 중요하다.

정부의 용기를 민간이 받쳐줘야 한다. 경제 위난의 시대엔 기업이 구세주다. 비상경영도 중요하지만 기업에는 배려와 결단도 필요하다. 고위직이 임금을 줄이면 많은 근로자가 떠나지 않아도 된다. 아껴야 하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의 지혜까지 아껴선 안 된다. 더 어려운 중소기업을 살피는 배려까지 아껴선 안 된다. 위기 때 가족이 뭉치듯 노사가 뭉쳐야 할 것이다. 노사가 위기 극복의 지혜를 만들어 내면 이번 위기는 왜곡된 노사문화를 바로잡을 기회가 된다. 새로운 노사문화가 생기면 금융위기로 선진국을 탈출한 국제자본이 한국을 찾을 것이다.

남과 북은 지난 1년을 허송했다. 2009년은 남북관계 돌파의 해가 되어야 한다. 남북관계는 원칙과 현실의 끈기 있는 동행(同行)이다. 원칙은 북핵 폐기를 달성하고 북한에 줄 것과 주지 못할 것을 구분하는 절도(節度)를 지키는 것이다. 현실은 북한을 대화의 테이블로 이끌어 내고 금강산·개성공단 등 각종 교류를 평화적으로 관리하는 것이다. 정권은 이 어려운 줄타기를 해내야 한다. 새해는 새 술을 담는 새 부대가 될 수 있다. 정부는 남북 정상회담 합의를 원칙적으로 수용하고 남북 교류에 대한 진의(眞意)를 북한에 설득시켜야 한다.

다시 새기는 ‘12척’의 정신

오바마 등장으로 한·미 관계엔 새 장이 열리고 있다. 이 대통령과 친했던 부시는 가고 생소한 오바마가 온다. 이 대통령은 하루빨리 ‘정상의 스킨십’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오바마 정권이 북한과 직접 대화에 나서면 한국이 마다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북핵 폐기를 위한 한·미의 찰떡 공조가 바탕에 깔려야 할 것이다.

오바마 정권과는 까다로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미국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재협상이나 한국군의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요청하는 것이다. 두 가지가 겹칠 수도 있다. 정권은 촛불사태 같은 반미·이념적 혼란이 재연되지 않도록 국민과 소통하고 한·미 간에 이해를 넓혀 나가야 한다.

위기는 수년의 문제지만 교육은 백년대계다. 지난해엔 학교 자율화, 교원평가, 학력평가, 국제중 설립 등을 둘러싸고 교육 현장에서 수많은 갈등이 분출됐다. 이런 대립은 올해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정부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자율과 경쟁의 교육정책 기조가 뿌리내리도록 해야 한다. 입시를 포함한 대학 자율화를 확대하고 자율형 사립고 설립 등 다양화 교육을 실천해야 한다. 새 위원장의 전교조도 투쟁적 대응을 접고 교육 현장의 대안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1년 후 오늘, 중앙일보는 한국 사회가 배 12척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위기 극복의 발판을 어떻게 마련했는지 쓰고 싶다. 비상 상황이지만 한국인은 초비상의 각오로 이겨낼 수 있다. 그게 한국인의 저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