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삶과 문화

"먼저 인간이 되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며칠 전 신문에 연재되는 배우 이야기를 읽다가 내가 등장하고 있어 긴장한 일이 있다. 늦깎이 배우지망생 K는 우리집 문전을 10개월이나 배회하다가 안채에서 마루의 소파에 베레모를 쓰고 앉은 나를 처음 만났는데 감독은 담배를 피우다가 자기를 보고 자네 그런 얼굴 갖고 배우 되겠어 하더란다. K는 감독님은 스타니슬라프스키도 안 읽으셨습니까. 어떻게 배우의 능력을 안 보고 관상만을 보십니까. 좋다. 내일 새벽 충무로 다방으로 나와라. 이것이 그에게 배우의 길이 트인 사연이라고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나는 아직 담배를 입에 댄 일이 없고, 좁은 마루에 소파는커녕 베레모는 서울에 없을 때고 더욱이 엑스트라에게까지 반말을 쓰지 않는 나를 시나리오처럼 각색했지만 그가 지금 인기 배우이고 나를 영화계로 이끌어준 은인으로 추대하는데 굳이 탓할 것까지야 있겠는가. 자기와 내가 그것을 기정사실화하면 되는 거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난해 어떤 TV에 같은 내용이 드라마로 꾸며져 화려한 응접실에서 감독의 대역배우가 거드름을 피우며 배우지망생 K에게 호통치는 장면을 보았다는 제자의 말을 상기하니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세상에는 자기의 과거를 미화해 타인에게까지 누를 끼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좋은 일을 수없이 하고도 겸손하게 떠나간 작은 영웅도 있다. 1960년대 초 충무로가 아직 영광을 누릴 때 중부서 앞 골목 2층집에 배우학원이란 간판이 걸려 있고 현관을 들어서면 "먼저 인간이 되라"라고 쓰인 큰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김인걸 원장은 이 집에서 수백명의 학생을 20여년 동안이나 길러 영화와 방송에 내보냈으며 지금 일하는 졸업생이 100명은 넘지만 이 초라한 학원을 다녔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신성일.최지희.박근형.윤양하.김세윤, 어릴 적 손창민도 이곳에서 연기를 배운 것을 숨기지 않는다. 김 원장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으나 내가 아는 바로는 평안남도 부농의 막내로 자라 일본대학에서 영화 공부를 했으며 광복 후 서울에 정착해 영화제작을 시작했다. 56년 유현목 감독을 픽업해 교차로를 만들 만큼 영화에 대한 정열과 인재를 찾는 눈이 앞서 있었으나 그 후 실패하고 배우학원을 차린 경위는 자세하지 않다.

다만 충무로 비좁은 다방의 담배연기가 싫어 학원 사무실로 찾아가면 늘 따뜻하게 대해줘 많은 감독이 그곳을 애용했다. 그리고 70년대의 부진한 한국영화를 걱정하며 이만희.김기덕 등 정예감독들이 15인 클럽을 만들어 활동한 장소이기도 했다.

원장은 감독들에게 강의를 맡기고 영화사를 찾아다니며 아이들 출연을 교섭했고 의상.분장.교통비까지 부담하며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현장에 내보내려는 노력은 눈물겨웠다.

이 무렵 K가 야간반에 들어왔고 순박한 인상에 어눌한 행동이 원장의 관심을 끌게 됐고 내 영화에 추천한 것이 실현돼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원장은 주말이면 전국을 누비며 사진을 찍어 여행기를 신문에 실었고 클래식 기타 연주 솜씨가 프로 수준이었다. 노후에 명동성당을 자주 찾았는데 그 옛날 고향에서 선친이 환갑잔치 비용 1000원을 평양교구를 통해 빈민에 기부한 증서가 발견돼 어렵지 않게 신자가 된 것이다. 김 원장의 빈소는 쓸쓸했다. 신성일과 나 그리고 단역배우 한 사람이 모두였다. 전성기의 K는 바빠서 못 온다는 연락이다.

나는 연재를 쓰는 필자에게 e-메일을 띄웠다. 잘나가는 배우에게 걸림돌이 될 말을 애써 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가 더 큰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과거에 대해서도 솔직하고 정직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를 키우고 후원한 것은 원장입니다. 나를 은인처럼 띄우고 있어 돌아가신 분에게 부담스럽고 송구스럽습니다. 그의 답신은 이렇게 끝났다. 제가 감동적으로 느낀 한 인물의 과거사가 전부 꾸며낸 이야기였다고 생각하니 저 역시 가슴이 답답하고 한없이 괴로웠습니다.

김수용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