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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e칼럼

도자기 마을에 골프채를 사러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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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도자기 마을 Stoke-on-Trent. 영국을 찾는 남자들 대부분은 빈티지 오디오 장만을 염원하고, 여자들은 본 차이나 한 세트 마련을 꿈꾸며 Stoke-on-Trent를 찾아온다는데…. 골프장만 쫓아다니던 한 쌍의 남녀는 잘못된 정보 해독을 계기로 이 곳으로 찾아들었다.
리버풀에서 묵었던 호텔 인포메이션 파트에 Stoke on Trent에 대한 브로셔가 비치되어 있었다. 도자기 마을로 유명한 Stoke on Trent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사진들…, 그러나 살림과는 밀착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우리에게 도자기 같은 아이템은 당연히 스킵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눈을 번쩍 뜨이게 했던 마지막 대목 '이 곳에 가면 웨지우드 같은 유명 브랜드도 팩토리샵에서 싸게 구입할 수 있다'. ‘웨지우드? 웨지도 아닌 것이, 우드도 아닌 것이… 그건 도대체 어떤 골프채란 말인가?’

숏게임 향상이 지상 과제인 한 남자에겐 새로운 웨지가 필요했고, 타이거우'드'로 통하는 한 여자는 늘 우드에 관심이 많았다. 결국 우리는 신병기 웨지우드를 사기 위해 부푼 가슴을 안고 이 곳을 찾아왔던 것이다.

마을에 들어서며 처음 눈에 띈 앤틱 샵에 차를 멈춘 것도 오로지 가게 쇼윈도우에 붙여놓은 'Wedgewood' 문구 때문이었다.
"웨지우드를 좀 사려고 왔습니다."
"아 예 특별히 찾으시는 모델이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일단 좀 보고 싶습니다."
"이게 다 웨지우드입니다."
주인 할아버지가 가리킨 선반 위에는 푸른 바탕에 흰색 그리스 문양들이 양감 처리된 도자기를 비롯하여 핑크 꽃 그림이 만발한 각종 그릇들이 도열하고 있었다.
"아… 예… 맞습니다… 웨지우드… 예… 아주… 좋네요…(버벅버벅)"
설마 ‘웨지우드’가 영국 본차이나의 대표 브랜드 중 하나일 줄이야.

그날 밤 우린 각자 머리 속에 그리고 있던 '웨지우드'의 모습을 고백하는 엄숙한 시간을 가졌다. 남편은 웨지와 우드를 결합시켜 놓은 새로운 유틸리티 클럽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고… 특히 그것은 영국 링크스 잔디에 최적화된 변형 우드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must have item이었단다. 한편 나는, 웨지와 우드가 결합된 고전적인 앤틱 골프채를 연상하고 있었다. 그 옛날 웨지 헤드는 아이언이 아닌, 나무 재질로 만들어졌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우드와 구분하기 위해 웨지우드라는 이름을 얻었을 것이라 혼자 추론하며…. 앤틱에 열광하는 나에게도 이 클래식 골프채는 당연히 must have item이었다.

그렇게 우리 무식의 소치로 들르게 된 Stoke-on-Trent는 영국의 공업지대인 미들랜드의 도시로 본 차이나 도자기 산업의 중심지다. EU는 이 곳을 유럽 산업화의 한 과정을 보여주는 상징적 도시로 지정하고 있었다. 맨체스터의 방직공장이나 와트의 증기기관차만 산업혁명의 기수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 도자기 마을에서도 자본주의 초창기의 비참한 임노동이 시작되었고, 시간제 노동에 따라 연령별, 성별 노동착취가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던 모양이다.

도자기 박물관을 돌다 보면 아름다운 도자기 제품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 어떤 노동, 기계, 에너지의 공급과 전환이 있는 지, 이 과정에서 인간은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처하는 지를 이해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1800년대부터 산업혁명 시기를 걸쳐 이 곳을 통해 유통된 본차이나의 화려한 꽃무늬들은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눈물로 찍어 그린 노동자들의 작품인 것이다.

도공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노동 착취를 당하며 전염병으로 죽어나가던 이 가난했던 시골 마을에도 골프장은 여러 개가 있었다. 사전 정보가 부족했기에 복불복으로 발탁한 이 곳 Wolstanton GC. 키 큰 나무들이 도열하고 있던 기억이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다.

골프장 순위나 역사 면에서, 그리고 위치와 규모 면에서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 없는 파크랜드 형의 소박한 동네 골프장이었다. 하지만 골프장을 경험하면 할수록, 이게 사람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리 못나고 내세울 것 없는 사람이라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고, 그 매력은 아무리 잘 난 사람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색과 향이라는 사실.

골프장이 딱 그랬다. 1인당 40 만원이 넘는 골프장이 뿜어내는 아우라도 근사했지만, 1인당 4 만원 짜리 동네 골프장이 주는 편안함도 이에 못지 않는 매력을 발산한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골프장 랭킹에는 큰 가중치가 적용되지 않았고 모든 골프장들이 다 좋았다.

“지금까지 갔던 골프장 중에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그냥 다 좋았어요."
성의 없이 대충 얼버무린 대답이 아니었다. 진실로 모든 골프장들이 다 좋았다. 다들 저만의 색깔로 쨍쨍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자기 마을의 평범한 골프장 Wolstanton GC는 코스보다 사람이 더 인상적인 골프장이었다. 이 곳에선 코스에 대한 기억 보다는 라운드를 마치고 18홀 옆 벤치에 앉아 옆 테이블 아저씨들과 칼스버그를 연거푸 들이키며 뒤이어 들어오는 팀들을 하나 하나 뒷담화로 품평했던 즐거운 기억이 남아있다.

이다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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