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은 계약 당시 예상 넘어섰고 은행은 손실 위험성 설명 불충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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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옵션거래 ‘키코(KIKO)’를 둘러싼 기업과 은행 사이의 분쟁에서 기업 손을 들어 주는 사법적 판단이 처음 나왔다. 계약 효력을 정지시켜 달라며 기업이 낸 가처분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인 것이다.

모 중소기업이 신한은행을 상대로 제기한 키코 효력 정지 가처분신청은 지난 18일 법원에서 기각된 바 있다. 유사한 사안인데도 이번엔 반대의 결정이 나온 것이다.

이에 따른 경제적 파장은 예상 범위를 한참 넘을 듯하다. 비슷한 계약으로 이미 소송이 줄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키코피해대책위원회에 접수된 피해 업체 170여 곳 가운데 134곳이 은행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다른 사안에서도 이 같은 결정이 내려질 경우 피해 업체들의 손실액은 크게 줄겠지만 키코를 판매한 은행들의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다. 기업이 남은 계약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은행이 거래 상대방 대신 지급해 줘야 하기 때문이다. 즉 기업이 보게 될 손실만큼을 은행이 대신 져야 하는 것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재판부가 키코 계약이 ‘불평등 계약’이라며 기업 손을 들어 줬다는 것이다. 30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50부는 키코 피해 기업인 모나미와 디에스엘시디가 SC제일은행을 상대로 신청한 ‘옵션계약 효력 정지 가처분’을 받아들이면서 “환율이 급등하면 기업이 무제한의 손실을 볼 수 있는 키코 계약은 거래 목적 등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재판부가 달러 대비 원화 가치가 크게 하락(환율 상승)했다는 이유로 기업이 계약을 해지할 수 있도록 한 것도 키코가 원천적으로 불평등 구조임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올 들어 달러 대비 원화 가치는 25%나 하락했다. 법원의 이 같은 결정에 따라 모나미 등은 11월 3일 이후 발생한 손실액을 은행에 낼 필요가 없게 됐다.

재판부는 또 “은행이 통화옵션거래의 위험과 잠재적 손실을 충분히 설명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판단했다. 은행이 상품 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고 팔았다(불완전 판매)는 기업 측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와 함께 재판부는 키코 피해 업체의 손해배상청구 가능성을 열어 뒀다. 관련 소송이 쏟아질 가능성이 크다. 다만 재판부는 “실제 배상액은 기업들의 과실 정도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피해 중소기업들은 본안 소송에서도 키코 계약 자체의 무효 판결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키코피해대책위 정석현(수산중공업 회장) 위원장은 “법원의 결정으로 피해 기업들이 당장 돈을 갚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부도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반면 은행들은 상당히 불리한 판결이라며 앞으로의 파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SC제일은행 정윤영 홍보 담당 상무는 “법원의 정식 통보를 받은 뒤 대응책을 결정할 예정”이라며 “쟁점이 되는 불완전 판매 여부에 대한 법적 부분이 재검토될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들은 특히 약관상 하자가 없는데도 환율이 변했다는 이유로 정상적인 계약 내용을 부인한 것은 불합리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름을 밝히길 거부한 시중은행의 한 파생상품 담당 부장은 “모든 금융 거래는 현재의 주가·환율을 기준으로 이뤄지는데 나중에 이게 바뀐다고 해서 계약을 무효로 한다면 누가 금융 계약을 할 수 있겠느냐”며 “자본 시장 발전에 큰 장해가 되는 판결”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이 같은 법원의 결정이 잇따를 경우 은행은 막대한 손실을 볼 것으로 보인다. 국내 은행들은 기업과 키코 계약을 체결하면서 일정 수수료를 받는 대신 외국계 은행과 반대 방향의 통화옵션 계약을 맺었다. 은행이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아 외국계 은행에 지급하는 구조다. 만약 기업이 돈을 내지 않으면 은행이 대신 갚아야 한다. 태산LCD가 기업회생 절차에 들어가면서 키코 손실을 하나은행이 떠안은 게 대표적인 사례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키코에 가입한 487개 수출 기업의 손실은 원화 가치가 1090원이던 지난 8월 말 1조7000억원, 1291원으로 하락한 10월 말 3조2000억원으로 급증했다. 11월 말 달러당 원화 값(1478원 기준)으로 손실액을 계산하면 4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김준현·조민근 기자

◆키코(Knock In Knock Out)=달러 값이 일정 범위를 웃돌 경우 계약 금액의 2~3배에 달하는 달러를 시장에서 비싸게 사서 은행에 싸게 팔아야 하는 구조의 파생상품 계약이다. 반대로 달러 값이 일정 범위 아래로 떨어지면 계약은 해지된다. 금융감독원은 달러 값이 10원 오를 때마다 기업들의 전체 손실액이 1000억원씩 늘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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