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외상값 받으러 심부름 온 아이처럼…” 황지우 시인 연하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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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황지우(56ㆍ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씨가 연말 연시를 맞아 각계 각층에 보낸 연하장이 화제다.

세월을 ‘외상값 받으러 심부름 온 아이’에 비유했기 때문이다. 세월이라는 이름의 이 아이는 섣달 그믐 문(門) 앞에서 종종 거린다. 1년이라는 시간을 보냈으면 뭔가 남는 일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주인공 자신의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시인은 “아, 또 저 녀석을 뭐라 달래어 보내지요?” 라고 묻는다. 작년 이맘 때에도 올해엔 꼭 갚겠다며 다짐했건만 올해도 그냥 되돌려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내년에는 꼭 ‘외상값’을 갚겠다고 약속을 해야 하는데 해마다 빈말만 늘어 놓았으니 말이다. 시인 특유의 감수성으로 써내려간 연하장은 그래서 멋진 한 편의 시다. 읽고 나면 가슴 한켠이 짠 해온다. 친필로 쓴 연하장 말미에는 시인이 직접 만든 낙관이 찍혀 있다. 한 마리 날아가는 새다.

황지우 시인의 대표작으로는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나는 너다’등이 있다.

황지우 시인이 보낸 연하장 전문

세월이, 외상값 받으러
심부름 온 아이처럼,
섣달 그믐 門 앞에서
종종거립니다.
아, 또 저 녀석을 뭐라 달래어 보내지요?
지난 한 해 厚意에
감사드리며
눈돌려 乙丑年 새해 향해
벅찬 숨 한번 쉽니다

황지우 拜上
Dec. 2008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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