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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술과 신예술의 만남 꿈꾸는 사이버 음악가 재런 래니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피아노·바이올린·마이크·녹음장비….음악가가 친해져야할 도구라고는 이걸로 충분하던 시대는 지났다. 인간의 지능수준에 가장 가까운 도구,컴퓨터를 활용하는 예술가들은 앞다퉈 새로운 예술의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컴퓨터? 그것도 알고보면 신종 바보상자 아냐? 만일 당신이 이렇게 생각한다면 초창기 피아노도 바흐 시절엔 전혀 환영받지 못했다는 걸 기억해보라.예술적 감성이 기계문명에 대해 갖는 원초적 거부감은 20세기만의 현상은 아니다.

세기말,음악가들은 온갖 차림으로 무대에 오른다.전자바이올린에 초미니스커트로 2백년도 더 된 곡을 연주하는 10대 천재가 있는가 하면,동양인 친구의 꾐에 빠져 알몸으로 등장한 백인 첼리스트도 있다.대중음악가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찢어진 청바지,속옷같은 겉옷,춤추기에 적합한 헬멧형 마이크.이 요란스런 틈새에 연미복 대신 첨단 가상현실(Virtual Reality)장비로 무장한 음악가가 무대에 오른다고 해서 딱히 이상할 것은 없다.

무대에는 피아노도 바이올린도 없다.스키 고글처럼 생긴 헤드 마운티드 디스플레이(HMD:Head Mounted Display)를 쓰고,한손에 데이터 장갑(Data Glove)을 낀 음악가는 마치 우주유영을 하듯 다양한 몸동작으로 음악을 만들어낸다.그의 악기는‘사이버 색스(Cyber Sax)’와 ‘사이버 실로(Cyber Xylo)’.색소폰과 실로폰에서 이름을 본뜬 이들 악기는 음악가의 움직임에 따라 어느 재즈연주 못지않은 즉흥적인 연주를 풀어낸다.

관객은 듣는 동시에 본다.HMD를 통해 음악가의 눈앞에 펼쳐지는 3차원 영상은 대형화면을 통해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된다.음악가 자신의 말마따나 관객들은 “우리 세기의 위대한 예술 세가지-재즈와 영화와 컴퓨터 프로그래밍이 어우러진” 퍼포먼스를 즐기는 것이다.

지난 92년 미국 시카고에서 초연된 이래 오스트리아·캐나다 등에서도 연주된 이 작품의 이름은 ‘한손의 소리’(The Sound of One Hand).첨단 기술과 새로운 예술의 만남을 꿈에서 현실로 옮겨놓은 몽상가는 올해 서른여섯의 미국인 음악가 재런 래니어다.

재런 래니어-음악가? 그는 80년대초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컴퓨터게임용 음향을 만들면서 돈을 벌었다.이후 그는 영상과 음향을 사용하는 프로그래밍 언어 개발에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에서 데이터 장갑이라는 새로운 입력장치를 만들었다.이는 HMD의 개발로 이어지고,이 장비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구체적으로 ‘사이버 스페이스’를 체험하도록 만들었다.가상현실이라는 용어 자체도 그의 작품.

컴퓨터로 음악을 한다고 해서 끽끽거리는 기계음을 음악이라고 우겨대는 괴짜라거나,노래방 반주기계보다 조금 더 발전한 샘플러에서 음악을 조립해내는 엉터리로 속단하지 말기를.그의 입장은 명확하다.“음악은 그 자체로 의미있는 무언가를 갖고 있다.과학기술은 그 자체로서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음악은 그에게 가상현실보다 한참 거슬러 올라가는 ‘첫사랑’이다.뉴멕시코의 그의 집은 전세계에서 구한 수백가지 악기가 가득한 것으로 유명하다.라오스와 태국 북부지역의 관악기인 카헨,중국의 현악기인 구정(古箏).주특기는 역시 피아노지만 그는 이들 낯선 악기를 위해 곡을 쓰고 직접 연주한다.

“악기는 문화와 시간을 여행하는 도구”라고 말하는 그는 피아노조차도 카헨처럼 이국적이고 낯선 문화권의 악기처럼 들리도록 곡을 쓰기도 한다. “악기는 한 시대에서 기술적으로 가장 앞선,때로는 전쟁무기보다도 앞선 도구”라는 것도 그의 주장.그렇다고 ‘가상현실’이 피아노나 카헨보다 앞선 기술이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이게 다 무슨 얘기냐고? 궁금하다면 직접 방문해서(http://www.well.com/user/jaron) ‘지금 막 탄생하고 있는 다음 세기의 예술’을 기꺼이 끌어안는 이 음악가에게 물어보라.참,그는 짧은 전자우편 회신에서 한국인 독자들이 기쁘게도,거문고를 연주할 줄 안다고 전했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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