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시론>사회를 우롱한 청문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4월7일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됐던 청문회를 시청하다말고 나는 오랫동안 책장에 꽂아만 두었던 국어사전을 꺼내들어야 했다.그것은 내가 알고 있다는 지극히 일반적인 지식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었다.과연 우리의 국어사전에는 그 청문회에서 난무했던 진실이란 단어의 해석이 있는 것일까.있다면 평소에 내가 익히 알고 있다고 믿어온 단어의 정의 그대로인가 하는 의구심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그날의 청문회는 우리 서민들이 가진 가치관(價値觀)은 물론 지극히 상식적인 지식의 밑둥까지도 가차없이 뒤집어놓은 주술적(呪術的)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는 증언을 해달라는,바위에 이마를 찢는듯한 어느 야당의원의 피맺힌 호소는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그러나 정태수(鄭泰守)씨는 그런 호소조차 한낱 공염불이며 짖어대는 소리로 반전(反轉)시킬 수 있는 괴력(怪力)조차 갖고 있었다.나는 그런 장면들을 바라보면서 폭력적인 유혹까지 받는 배신감에 떨었다.이 세상에 과연 진실이란 언어는 존재하는 것이며,있다면 그것이 똑바로 서 있을 수 있는 사회적 토양은 과연 있는 것인가 하는 깊은 회의에 빠져들게 만든 하루였다.

진실의 정립(定立)은,그것이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의심의 기반 위에서만 성립될 수 있다.상황증거가 명백한 살인범에게도 새로운 검증과 재판의 과정을 거치게 하는 이유도 과연 그것이 사실인가 하는 의심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의 정태수씨는 진실규명은 커녕 자기 변명에 유리할 수도 있었던 의심이란 여지조차 스스로 완벽하게 봉쇄시켜 버리는데 성공했다.시종일관 흥분하지 않았던 태도와 무관심,그리고 밀착감(密着感)이 전혀 없는 동의어(同意語)의 반복

은 19명이나 되는 특위위원들의 시퍼런 칼날을 단숨에 부러뜨리고 말았다.

구태여 물리적 승패를 따지자면 그날의 청문회에서 승리한 자는 진실규명이란 칼을 든 19명의 무사(武士)들이 아니라 공교롭게도 무장해제돼 있던 포로였다는 결과에 절망과 좌절을 느끼게 된다.의원들이 제시하는 구체적인 수치와 급소를 찌르는 질문도 그에게는 전혀 위협적이지 못했다.어떤 호소와 위협에도 합당한 대응을 하지 않았던 그의 단순하고 시큰둥한 언어동작은 분명 요술(妖術)이었다.그것을 사회적 언어로 자물통으로 표현하고 있는듯 하지만,자물통 아닌 요술이란 것을

그날의 청문회는 충분히 입증해주었다.

그러나 우리는,바로 자신의 요술에 스스로 최면이 걸려버린 한 쇠락한 인간의 초췌한 모습을 정태수씨로부터 만나게 된다.물리적으로는 이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여망도 없게 된 그가 마지막으로 갖고 있는 것은 기업가로서의 자존심일까

.그것도 아니다.그가 지금 이 시점에서 갖고 있는 것은 이 사회를 우롱(愚弄)해 보자는 몰염치한 유희의식이다.그는 나라 경제를 망쪼들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청문회에 쏠려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귀중한 시간까지 빼앗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 시간의 유희는 청문회에 질문자로 나섰던 특위의원들도 마찬가지였다.주객의 전도가 바로 그것이다.상식적으로 그 청문회의 동기와 구성은 묻고 대답하는 것이 전부다.그런데 질문을 던진 사람이 답변의 시간을 할애하는데 매우 인색했거나

한술 더떠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도 여러번 나왔었다.그러면 질문은 왜 하고 있는가 하는 원론적인 회의와 만나게 된다.그렇기 때문에 인기를 위한 소모적 발언,그리고 국민의 이름을 빌린 변명과 당리당략을 염두에 둔 상대방 흠집내기에 급급했던 특위위원들은 반성해야 하고 스스로 그 자리를 떠나는 아량도 보여야 한다.

그 자리는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위기와 정치위기를 낳게 만든 불행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다.청문회에 부여된 시간을 그런 하찮은 일에 탕진해서는 안된다.텔레비전을 일찍 꺼버린 까닭은 거기에도 있었다. <김주영 작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