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이래서야>2. 이완용 賣國도 옳은 일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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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최근에 와서 우리 사회의 복고주의·상대주의·상황주의가 심해지고 그 때문에 역사적으로 옳고 그른 것의 판단이 흐려지는 일종의 몰가치론적 문화현상이 심화하고 있음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옛것이고 우리 것이면 모두 좋다는 식의 복고주의나,어떤 역사적 사실을 두고 그 옳고 그름을 가리지 못하는 상대주의나,그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상황주의적 인식에 빠져버리면 그 사회는 역사 실패를 되풀이할 위험이 크다.

이완용이가 아니더라도 별 도리가 없었지 않았느냐,일본이 국권을 강탈한 것이지 왕실이 무슨 죄가 있느냐는 식의 역사인식이 나타나는가 하면 4·19 묘소를 국립묘지로 승격시키면서도 한편에서는 이승만찬양론이 나오고 있다.이렇게 가다가는 광주 5·18 묘지를 성역화하고도 전두환·노태우 찬양론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을까 걱정이다.

재론하는 일조차 구차스럽지만 우리의 건망증 문화가 너무 심해 다시한번 ‘진상 규명’을 하지 않을 수 없다.승산없는 전쟁인줄 알면서도 싸우다 죽는 의병이 4만명이 넘을 때,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은 라이벌 송병준에게 공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합방’을 서둘렀고 그 결과 일본의 귀족이 되었다.독립군 전사들이 만주벌판에서 죽어갈 때 이완용은 호의호식하고 와석종신(臥席終身)했다.일본인들조차 이완용이 제 명에 죽은 것은 조선사람들 천추의 한이 되리라 안타까워했다.의병과 독립군의 죽음도 의로웠고 이완용의 매국도 부득이했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을까.

왕실이 국권을 스스로 내어주지는 않았고 빼앗긴 것이 사실이다 하자.그러나 왕족들이 35년간 일본 귀족이 되어 우대받고 살 때,그 백성이었던 민중은 민족해방운동전선에서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다.왕족은 겨우 한 사람이 국외로 탈출하려다 잡혔을 뿐이다.국권회복을 위해 풍찬노숙하다 죽은 독립군도 역사적으로 옳고 일본 귀족이 되어 영화를 누린 왕족도 우리 왕족이니까 옳게 보잔 말인가.

총독부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왕궁을 복원한다는데 그것을 관광자원 복원으로만 볼 수 있을까.우리 것이라면 반역사적인 것이라도 모두 가치있는 것으로 보고 또 복원해야 할까.우리 말도 제대로 못하는 왕족이란 사람이 민주공화국시대에 황손을 자칭하면서 “비정치적 차원에서의 황실 복위”운운하는 것도 혹시 국민의 혈세로 왕궁이 복원되는데 힘입은 것은 아닐까.

역사적 인물이라 경칭은 생략하고,이승만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것도 사실이지만 단선·단정론자 즉 분단국가 수립론자요,독재자인 것도 사실이다.그 이승만도 역사적으로 옳고 민족분단을 반대하고 통일국가 수립을 고집하다 더러운 하수인의 손에 암살된 김구도 역사적으로 옳단 말인가.국립묘지에 묻힐 만큼 이승만도 역사적으로 정당하고,장소는 다르지만 역시 국립묘지에 묻혔으니 4·19 영령들도 정당하다는 것이 우리식 역사인식이다.중·고등학교 역사 선생님들이 어떻게 가르칠까 정말 걱정스럽다.

이승만 찬양론이 나왔으니 곧 박정희 찬양론도 나올 법하다.정치·사회·문화 부문에 엄청난 군사문화의 악폐를 끼치고도 재벌중심 경제발전에 성과가 있었다 해서 그 정권의 역사성을 긍정하고,또 그 독재와 싸운 민주화운동의 역사성도 높이 평가하는 식이라면 전두환·노태우정권의 성립도 옳았고 5·18 영령들의 저항도 옳았다는 해석이 나올 법도 하다.

역사적으로 상반되는 두개의 사실에 모두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가치있는 것이 없다는 것과 같으며,몰가치적 역사인식은 씨없는 열매와 같다.몰가치성 문화의 바탕에서는 일본의 식민지배 긍정론에 반대할 이유가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강만길 고려대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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