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협력사, 비전까지 나눠야 업그레이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3면

삼성 등 30대 기업집단이 올 한 해 중소기업과의 상생협력에 지원한 것으로 집계된 금액은 2조3484억원이다. 이는 3년 전인 2005년의 1조401억원의 두 배를 넘는 규모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내놓은 이 수치를 보면 대·중소기업 간 상부상조는 양적으로 급성장했다. 하지만 10년 만에 찾아온 글로벌 경제위기를 이겨내려면 한 차원 높은 상생협력이 필요하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에 여전한 갈등의 골을 메우고 진정한 연대의식을 키워야 한다.

◆대·중소기업 간 인식 차 여전

“대기업 회장들의 청와대 대통령 간담회에선 ‘상생’을 논하지만 현장에선 체감할 수 없어요. CR(납품단가 인하) 압력은 여전해요.” 자동차 부품업체 임원의 말이다. 상생협력이란 같은 말을 놓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인식 차는 여전히 크다. 산업연구원의 지난해 조사를 보면 대기업이 평가한 상생협력 지수는 125.4(2004년 100 기준)인 데 비해 중소기업은 114에 그쳤다.


왜 그럴까. 납품 단가와 대금 지급조건 개선 등 ‘공정거래’에 관한 양측의 인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상생협력 추진 요소로 중소기업은 공정거래(43%)를 최우선으로 꼽은 데 비해 대기업은 21%에 그쳤다. 중소기업연구원의 김세종 연구조정실장은 지난달 삼성경제연구소 심포지엄에서 “산업현장에서 원자재값 상승에 따른 합리적 비용분담 원칙을 세우지 못해 갈등이 커지고 상생협력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협력업체와 공동으로 ‘1부품 1엔 원가절감 운동’을 펼치는 일본 자동차 업계처럼 윈-윈 전략을 짜야 할 때라는 것이다.

◆중소업계의 자구노력

사실 공정거래는 상생협력에서 가장 기본적인 일이다. 세계를 상대로 싸우는 글로벌 대기업은 한걸음 나아가 협력사와 부품을 공동 개발하고 비전을 공유하는 ‘공동진화 단계’로 나가야 한다. 그래야 대기업을 둘러싼 ‘협력 생태계’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수 있다.

물론 대기업이 모든 협력업체를 ‘비전 공유’의 단계로 끌고 갈 순 없다. 서울여대 이종욱(경제학) 교수는 “대기업과 정보를 공유하는 단계로 발전할 수 있는 중소업체는 협력업체 중에서도 역량이 뛰어난 20~30%에 불과하다. 대기업 입장에서 어디서든 구할 수 있는 범용부품을 만드는 업체까지 다 챙길 수는 없다”고 말했다. 기술력이 뒤처지면 상생협력의 대열에서도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기업들이 좀 더 싼 부품을 찾아 해외로 눈을 돌리는 과정에서 토종 협력업체와 갈등을 빚는 것도 지혜롭게 풀어야 할 숙제다. 중소기업협력센터 강호영 팀장은 “기술이 뛰어난 중소기업에 상생협력 자금과 인력 지원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중소기업 스스로 역량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의 혁신→대기업의 상생성장 지원→중소기업의 수익성 개선→혁신역량 증가’의 선순환 구조를 이루기 위해 대기업의 측면지원 못지않게 중소기업의 자구노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2, 3차 협력업체도 손길을

글로벌 경기침체는 대·중소기업 상생경영의 시험무대다. 최근엔 국내 10대 그룹의 계열사 중에서 협력업체에 현금 대신 어음결제를 다시 주기 시작한 곳이 나왔다. 제 앞가림하기가 힘든 대기업이 늘어난 것이다. 산업연구원 주현 중소·벤처기업실장은 “대기업들이 향후 2~3년간 기술개발에 투자하느냐, 아니면 어렵다고 협력업체를 압박해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느냐에 따라 우리 산업의 미래가 달라진다. 재계와 정부가 상생협력의 분위기 조성에 더욱 힘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상생협력을 대기업-중소기업 관계에서 중소기업-중소기업 관계로 확대해 나가는 것도 남은 과제다. 영세한 2, 3차 재하도급 업체의 역량을 키워야만 1차 협력업체가 강소기업으로 커갈 수 있다. 최근 SK 계열사는 1차 협력사 선정 때 2차 협력업체에 대한 지원을 많이 하는 곳을 우대하기로 했다. 포스코는 납품업체가 주변 협력업체에 현금성 결제를 하면 가점을 주는 방식으로 2, 3차 협력업체에 대한 대금 지불 여건을 개선토록 유도할 계획이다.

한애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