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기다리며 색소폰 붑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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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호 20면

지난 17일 밤 10시 서울시청 부근의 한 택시 승강장. 길게 늘어선 택시들 사이로 가수 태진아의 노래 ‘동반자’의 선율이 울려 퍼졌다. 운전대를 잡는 대신 악보를 펴 놓고 색소폰을 부는 택시기사 황인규(58.사진)씨를 행인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행복은 여유

“스트레스 받을 때 이렇게 색소폰을 불면 행복해져요. 손님을 기다리는 시간에 이렇게 마음껏 연습합니다.”
그는 25년간 택시를 몰아온 베테랑 운전기사다. 색소폰 연주 경력은 그보다 훨씬 오래됐다. 중학교 때 밴드부에서 배운 색소폰은 40년간 그의 ‘동반자’였다. 황씨에게 행복은 늘 색소폰과 함께였다. 택시 운전을 시작한 이후에도 그는 색소폰과 악보들을 언제나 트렁크에 싣고 다녔다.

“생계 때문에 택시 운전을 시작했지만 좋아하는 색소폰을 놓을 수 있어야죠.”
택시 운전으로 두 남매를 대학까지 보낸 황씨는 젊은 시절엔 포항제철 동력부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택시 운전을 천직으로 삼고 있다. 택시를 몰다 보면 손님을 기다리는 시간은 길고 지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황씨는 색소폰이 있어 지루하지 않고 행복하다고 한다.

주부 정윤서(55)씨는 올 8월 첼로 연주회를 열었다. 5년 전 동호회 활동으로 시작한 첼로 실력이 어느덧 수준급이 된 것이다. 정씨는 “이 나이에 첼로를 할 수 있는 여유가 바로 행복”이라고 말한다. “늦은 나이에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는 것 또한 행복”이라는 얘기다.

주부 김하연(56)씨도 올해 민화 전시회를 열었다. 김씨 또한 전시회를 올해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했다. 그는 “좀 더 나이가 들어도 멋진 삶을 위해 민화를 그리면서 지내고 싶다”고 말한다. 모두 ‘멋과 여유’를 통해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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