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대 NGO대학원·본지 공동기획] 21세기 대안의 삶을 찾아서 ⑦<끝> 독일 프라이부르크 보봉 마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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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호 31면

1 보봉 마을 동쪽에 있는 태양광 주택 단지. 태양전지와 광전지 판으로 태양열을 받아 ‘서니 보이’란 발전기를 통해 전기를 생산한다. 2 흙 위에 통나무로 만들어진 친환경 놀이터에서 어린이들이 놀고 있다. 보봉은 주민의 30%가 18세 이하인 젊은 마을이다. 3주민들이 도심과 보봉 마을을 연결하는 트램(전차)에 오르고 있다. 트램에 자전거를 싣고 다니는 승객들을 쉽게 볼 수 있다. 4 한 마을 행사에서 남녀노소가 어울려 합창하고 있다. 주민 중 예술 분야 종사자가 많아 문화 생활을 폭넓게 즐길 수 있다.사진: 보봉 주민 연대(stadtteilverein)·롤프 디쉬 제공

독일 남부 도시인 프라이부르크. 시내 중심부에서 트램(전차)으로 여덟 정거장을 간 뒤 내렸다. 보봉-미테(Vauban-mitte). 보봉 지구의 한가운데에 있는 정거장이다.

도시 속의 車 없는 생태마을 골목엔 아이들 뛰노는 소리

도심에서 불과 3㎞를 달렸을 뿐인데 한적한 시골 간이역에 도착한 듯한 느낌이다. 나지막한 연립형 다가구 주택들이 정거장 양쪽에 펼쳐져 있다. 높은 것도 기껏해야 3~4층이다. 주택 단지로 접어드는 폭 2m가량의 진입로는 차가 들어가지 못하게끔 보행자와 자전거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외발 자전거를 탄 어린이 두 명이 곡예를 하듯 기자 옆을 스쳐 지나갔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대여섯 살쯤 돼 보이는 아이들이 바닥에 쭈그려 앉아 분필로 색칠을 하고 있었다. “뭐냐”고 묻자 “그냥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골목은 자동차 소음 대신 아이들 뛰노는 소리로 가득했다.

이상한 점은 집 앞이나 뒤에 차가 설 만한 주차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주차장이 있어야 할 자리엔 각종 나무와 넝쿨이 작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약속 장소인 ‘하우스 037’ 건물에 있는 레스토랑 ‘쥐덴’으로 들어갔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독일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을 안내를 해 주기로 한 ‘보봉 주민 연대(Stadtteilverein)’의 알무트 슈스터다.

-자동차가 안 보이던데.
“마을 남쪽과 동쪽 입구의 공용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들어와야 한다. 마을 안에선 자전거나 도보로만 움직일 수 있다. 우리 집도 차가 없다.”
차를 소유할 경우 주차장 이용료로 3700유로(680만원)를 낸다. 전체 성인 주민 중 40%만 주차장을 이용하는 것으로 돼 있으나 이 중 상당수는 방문객을 위해 마련해 놓는 것이라고 한다.

-차가 없으면 불편하지 않나.
“이곳에서 10년 동안 살았지만 차가 없어서 불편한 적은 별로 없었다. 도심에서 마을까지 트램이나 버스로 연결된다. 자전거로도 1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정 차가 필요할 때는 자동차 공동이용(Car sharing) 시스템을 이용하면 된다. 웹사이트에서 클릭만 하면 SUV든, 세단이든 원하는 차를 구할 수 있다.”

주민들은 입주 시 ‘차 없는 모임(Car-free association)’에 가입할지를 결정하고 매년 차 보유 여부를 신고한다. 슈스터를 따라 마을 안쪽에 있는 그의 집으로 들어섰다. 마당 한구석 나무로 만든 작은 창고 안에 자전거 4대가 눈에 띄었다. 열 살배기 아들이 있다는 그는 “자전거 한 대는 우리 집을 찾아오는 손님용”이라고 했다.

슈스터의 집은 ‘저에너지 주택(Low energy house)’이다. 프라이부르크시는 1997년 보봉 지구를 만들면서 에너지 소비 기준을 ㎡당 65㎾h 이하로 낮췄다. 1㎡를 덥히는 데 65㎾h 이하의 에너지만 쓴다는 뜻이다. 당시 독일 일반 가정이 ㎡당 200㎾h 안팎이었다는 점에서 3분의 1 이하로 맞춘 것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갔으나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자 슈스터가 손바닥으로 벽을 짚었다. “이 안에 20㎝ 이상의 두꺼운 단열재가 들어가 있다. 틈새를 완전히 차단해 열을 뺏기지 않도록 했다.” 여기에 큼지막한 2중, 3중의 유리창으로 채광과 방열 효과를 높였다. 슈스터는 “에너지 비용이 일반 주택의 15%에 그친다”고 설명했다. 마을 동쪽에 있는 태양광 주택 (Solar house) 50여 가구는 지붕 위에 태양전지판을 설치해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 생산량이 소비량보다 많아 전기회사에서 되레 돈을 받는다.

보봉의 장점은 차를 사 관리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고, 전기요금을 절약할 수 있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슈스터는 “공동체 중심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 좋다”고 했다. 골목에서 마주친 60대 여성 베노도 “빵을 서로 나눠주기도 하고 여행할 땐 애완동물을 옆집에 맡길 수 있는 등 상호 신뢰가 남다른 곳”이라고 말했다.

보봉 자체가 시민 공동체 운동의 산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곳에 주둔해 있던 프랑스 군대가 92년 철수하면서 부지를 어떻게 사용할지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생태마을을 조성하자는 시민단체의 제안이 시의회에 받아들여졌다.

안드레아스 델레스케 등 환경운동가들이 94년 ‘보봉 포럼’을 만들어 지구 계획과 건설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차 없이 살고, 에너지를 적게 쓴다는 원칙도 이때 정해졌다. 보봉 포럼은 잡지 발간, 편지 발송 등 광범위한 홍보 활동을 통해 시민의 관심을 끌어냈다. 그 결과 같은 직업, 같은 취미를 가진 이들이 크고 작은 동호인 주택 조합을 만들어 부지를 사들이고, 연립형 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특히 자유로운 전원 속 삶을 원하는 예술가와 학자·프리랜서 등이 대거 참여했다. 프라이부르크대 학생들은 조합을 결성한 뒤 시 측과 긴 줄다리기 끝에 프랑스군 막사 4개를 싸게 매입했다. 이 막사들은 4년간의 리모델링을 거쳐 저소득층 260여 명의 생활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마을이 들어선 다음에도 주민의 다채로운 목소리가 계속 행정에 반영되고 있다. 시 측이 프랑스 장교들의 카지노로 쓰이던 ‘하우스 037’ 건물을 허물고 더 많은 주택을 지으려 하자 주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결국 시의회는 이 건물을 1 마르크에 주민들에게 넘겼다. 이후 ‘하우스 037’은 스튜디오와 동호인 사무실, 교육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건물 앞 광장에선 매주 시장이 서고, 다양한 무료 공연이 열린다. 광장 옆 식품가게에 회원으로 가입하면 질 좋은 유기농 작물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현재 주민의 30%가 18세 이하다. 60세 이상 노년층은 2.2%에 불과하다. 그만큼 역동성이 큰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고령사회로 진입한 독일에선 매우 이례적이다. 프라이부르크 시청의 프란치스카 브라이어 환경국장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녀들의 연령층이 10대로 높아지고 있다”며 “생활여건 변화에 따라 지원을 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보봉의 ‘녹색 성장’은 삶의 질을 높이려는 주민의 욕구와 지방자치단체의 적극적 대응이 맞아떨어진 케이스다. 승용차 운전대를 잡지 않은 채 사는 생활은 어떨까. 사고의 전환만 할 수 있다면 우리나라에서도 가능한 일이 아닐까. 예를 들어 우리도 미군 기지가 이전하는 지역에서 실험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복잡해진 마음으로 트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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